(안견 & 강희안)
By 정순광 지국장
skjung6511@hotmail.com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면서도 출신이나 그림에 대한 생각에 있어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안견과 강희안, 두 사람의 가상 인터뷰를 엮어보았다.
안견은 1400년을 전후로 태어나 조선 세종과 문종 전후에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정4품 호군(護軍)을 지냈다. 1447년(세종 29년) 안평대군을 위하여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이듬해 《의장도》(儀丈圖)를 그렸다. 안견은 총명·정박(精博)하여 고화(古畵)를 보고 깊은 경지를 체득했으며, 여러 화가의 장점을 절충하여 웅혼한 필치로 많은 명작을 남겼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초상화, 사군자, 의장도 등에도 능했다.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화단에 영향을 미쳐서 신사임당도 어린시절 안견의 작품을 보고 그림 공부를 했다고 한다. 현재 안견이 그렸다고 추정되는 작품은 다수 있는 편이나, 그가 그렸다고 확인된 작품으로는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위키백과 발췌)
강희안은 1419년에 태어난 조선의 명신이며 서예가, 화가, 시인이다.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이다. 심온의 외손자이자 소헌왕후의 조카로 세종은 그의 이모부이며 문종, 세조 등은 사촌이다. 친동생으로 강희맹이 있으며 또다른 사촌으로 노사신, 박중선 등이 있다. 1441년(세종 23년) 문과 식년시에 정과 13등위로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그림에 능했을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세종이 옥새의 글씨를 맡길 정도로 당시에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만년에는 시·서·화로 소일하였으나 천기(賤技)라 하여 타인의 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집현전에서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에 대한 해석을 붙이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용비어천가》에 대한 주석을 붙이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시·글씨·그림의 3절로서 이름이 높았다. 대표작으로 《고사관수도》가 있으며, 저서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양화소록》이 있다. (위키백과 발췌)

안견과의 인터뷰 (조선시대로 돌아가 봅니다)
KJ: 최근 몽유도원도를 그려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림 내용에 대해 설명부탁드립니다.
안견: 비현실적인 신비로운 경치속에 우리의 실제 현실을 그려내려고 했지요. 끝없이 늘어선 층암절벽과 산봉우리들에 둘러싸인 초가집과 연분홍꽃 만발한 복숭아나무들, 산골짜기의 오솔길과 쪽배들은 바로 우리 주변의 산촌입니다.
KJ: 문인화와 다른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게 하는 것 같은데요.
안견: 저는 관념적이고 관조적인 화풍보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화풍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제 그림 ‘적벽도’를 보면 강물위를 떠다니는 배에 노를 젓는 사공이 웃옷을 벗어제친 모습으로 그려진 것도 하나의 예이지요.
KJ: 선생은 도화서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도화서란 어떤 곳인지요?
안견: 도화서는 예조에 속한 관청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아서 하는 곳으로 화원을 뽑을 때 대나무, 산수, 인물, 화초 등을 시험과목으로 하여 그중 두가지를 그립니다. 대나무 그림을 제일로 쳐주고 산수가 그 다음이지요.
KJ: 최근 정4품으로 승진돼 화단의 큰 화제가 되었는데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
안견: 화원들은 천한 가내수공업자와 다를바 없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대개 종6품이 최고의 자리지요. 그런데 제가 그 관례를 깼어요. 이렇게 화원들의 직위가 높아져야 화단이 더욱 발전하리라 봅니다.

강희안과의 인터뷰 (조선시대의 삶 속으로)
KJ: 선생님을 문인화의 대표주자라고 세간에서 말하는데 문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강희안: 그림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요 시(詩), 서(書), 화(畵)가 삼위일체로 조화를 이룰 때 바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지요. 이때 그림이라는 것은 시나 서에 종속되는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지요.
KJ: 그런 측면에서 도화원 화원들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강희안: 그런 류의 그림은 평가를 내릴 가치도 없지만 굳이 하자면 속되고 천한 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KJ: 최근 선생께서 그리신 ‘고사관수도’야 말로 선생의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데요.
강희안: 그렇습니다. 양반학자 한 사람이 바위를 의지하여 팔장을 끼고 엎드려 말고 잔잔한 호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장면은 조선시대 문인들이 명상에 잠겨 자신의 세계를 정리하는 모습이지요.
KJ: 그런 점이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관조적인 현실도피성을 드러내주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강희안: 물론 해석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현실대로 존재하고 그 현실은 철학적으로 조망하고 정리해내는 것은 또다른 부분입니다. 모두 다 현실을 좇아서 그 속에 매몰되어 살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조선시대 화가와의 가상 인터뷰에서 본 것처럼 스프링 브레이크 타임에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를 한번 자세하게 보면서 조선시대의 화가들의 일상과 그림을 그리는 마음, 그리고 화폭 속에 잠긴 유유자적과 꿈 속에서 본 무릉도원의 느낌을 자녀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