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콜라이 황제 이야기
러시아 제국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이야기입니다. 그는 생전에 덕과 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기로 이름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니콜라이 황제로서 그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들에게로 향해 있었으며 최대 관심사 또한 백성들의 생활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황제가 평민으로 가장하여 거리로 시찰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이라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차였는데, 때마침 갈림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지나가던 군인에게 다가가서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인이 어찌나 교만하게 굴던지 괘씸하게 생각한 황제가 입을 열었습니다.
“군인이신가 본데, 계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자 군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어디 자네가 맞춰보지 그래?”하며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내심 화가 났으나 꾹 참고서 황제가 말했습니다. “상사이신가요?” “아니.” “그럼 소위이신가요?” “아니, 내가 그렇게 밖에 안보이나!” “중위신가요?” “아니야.” “그럼 혹시 대위?” “맞네, 내가 대위 일세.” 대위는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한 듯이, 나온 배를 앞으로 내밀며 자랑스레 웃었습니다. 황제는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 “아! 그러시군요.”하며 재빨리 뒤로 돌아서 길을 가려고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뒷모습을 보던 대위가 그 모습이 보통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던지 황제를 불러 세웠습니다.
“혹시 자네도 군인인가?” “예.” “계급이 뭔가?” “한 번 맞춰 보세요.” “일등병?” “아닙니다.” “상병?” “아닙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대위 계급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대위도 아니라고? 대답하자, 갑자기 대위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소령이십니까?” “아닐세.” 대위는 뜻밖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되자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의 계급을 조심스레 질문이 소장, 대장, 원수까지 이를 동안 황제는 ‘아니’라는 대답만 거듭했습니다.
드디어 황제의 계급만이 남게 되었을 때, 대위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이보게 대위 계급이든 황제이든 우리는 다 마찬가지일세. 자네나 나나 하나님 아래서 다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래서 똑같이 창조된 피조물들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없신여기지 말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살아갑시다.
2. 느부갓네살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 BC 604-BC 562)
바벨론의 87년 역사 가운데 42년을 통치한 위대한 왕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 제국의 가장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느부갓네살 왕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교만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다니엘 4:20-21) 왕의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 거하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더라 하시오니. 1) 바벨론이 견고하여 높이가 하늘에 닿았다. 2)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두려워 할 정도입니다. 3) 모든 족속이 바벨론의 그늘 아래 거할 정도입니다. 4) 공중정원, 7대 불가사이 중 하나도 바벨론의 명물입니다. 이것 역시 느부갓네살 왕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큰 영화를 누리던 느부갓네살 왕이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5절)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뜯고, 이슬에 젖어 7년간 살 것을 꿈을 통해 보여주셨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큰 영화를 누리던 느브갓네살 왕도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다 잃어버리고 7년 동안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느부갓네살왕의 고백이 나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간증이지요.
(단 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아멘.
교만한 사람은 누리지 못하는 3가지
1)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제일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 말씀은 물론 사람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2) 더불어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독불장군입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불통입니다. 시기 질투가 많습니다. 분쟁도 잘 일으킵니다. 친구가 없고 싸움이 많이 합니다. 훼방도 합니다.
3) 손해 봄의 행복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행복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시면서 그 아픔 속에서도 흐뭇해 하셨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받을 때 보다 줄 때가, 용서 받을 때 보다 용서할 때가, 가질 때 보다 줄 때 더 행복해 합니다.
3. 겸손해진 느부갓네살 (37절)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1) 나를 높이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34절) 만약 주변에 사람이 없다면 ‘내가 교만하지 않았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교만한 사람을 들어 쓰시지 않으십니다. 7년 동안 짐승의 삶을 살고 난 후에야 깨닫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고서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2) 나를 낮추려하지 말고, 상대방을 높여주십시오. 우리에게는 교만해지려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겸손한 척’, ‘거룩한 척’, 되지도 않는 ‘척, 척, 척…’하다가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습니다. 나를 낮추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그 에너지를 남을 높여주고 세워주는데 쏟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자연히 높여주십니다.
겸손의 영성이 회복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여 존귀한 사람이 되시고, 귀한 간증거리가 많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