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님 이야기
혈기 많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다 좋은데 그 혈기가 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결단을 하고 경기도에 있는 오산리 금식기도원에 가서 20일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일을 금식하고 나니 도저히 배가 고파 못 참겠는데 온통 먹는 것만 생각이 났습니다. 금식이 끝나는 날에는 사모님과 여선교회 회장님이 흰죽과 물김치를 해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계속 흰 죽과 물김치가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를 때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라고 해야 할 것을 “흰죽이 오셨네, 물김치가 오셨네” 라고 헛소리가 나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가까스로 금식을 마쳤습니다.
금식을 끝내기로 작정한 마지막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사모님과 여선교회장이 빨리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같이 올 줄 알았는데 9시가 되어도 오지를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화가 났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위해 금식기도까지 하는데 보호식도 제때에 못 챙겨준다는 말인가?” 생각할수록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다가 그냥 기도원에서 내려와 버스터미널로 갔습니다. 그런데 막 도착한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는데 사모와 여선교회장이 보따리를 들고 내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니, 이런 못된 것들이 있나!” 목사님이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야 이 못된 것들아! 야 너네들이 배고프지 않다고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이제야 오냐? 이 못된 것들!” 그러면서 소동을 피우니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대낮에 소동을 피우니 사람들은 미친 사람인 줄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사모와 여선교회 회장은 난처했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목사님!”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선교회장님이 큰소리로 “아저씨! 아저씨가 참으세요” 라고 외쳤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저씨라는 말이 큰 충격으로 뇌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나를 보고 아저씨라고?” 목사님은 그 한마디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기운이 쫙 빠졌습니다. 혈기를 죽이려고 금식까지 하며 기도를 했는데 허탕치고 말았습니다. 혈기를 죽이기는 커녕 이게 무슨 망신인가?
목사님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는 기도원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목사님은 혈기를 뿌리 뽑기 전에는 안 내려올 작정을 하고 다시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아주 온유한 목사가 되어 존경받으면서 목회를 잘 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변화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를 20년 30년 다녀도 변화되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신약성경에 보면 ‘그리스도 안’이란 말이 169회나 나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신학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의 신학’이라 하는 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믿음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돈의 힘으로 세상 어떤 권력의 힘으로 인간의 수양이나 노력의 힘으로도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 안에서만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서서히 노력해서 새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절대로 사람의 노력으로 새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교육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육받은 옛 사람일 뿐입니다. 수양과 도덕을 닦으면 수양과 도덕을 닦은 옛 사람이지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노력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천국에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새 사람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그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 안’ 이란 말은 다른 말로 성령의 은혜로만 새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은 스가랴 예언자를 통해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고 오직 내 신으로 하리라”(슥 4: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희랍어에는 새롭다는 말에 두 단어가 있습니다.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성도의 새로움은 ‘네오스’가 아니라 ‘카이노스’ 입니다. ‘네오스’는 믿음생활을 오래해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네오스’ 모양의 변화입니다. 이발을 하거나 파마를 하거나 화장을 해서 새로워 보이는 것, 시간이 흘러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은 ‘네오스’ 입니다. 그러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이노스’입니다.
목사님이 화를 잘 내는데 변화가 되서 새 사람이 되어 온유해졌습니다. 거짓말하던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진실해졌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변해서 새 사람이 되어 부지런해졌습니다. 봉사 헌신하지 않던 사람이 새 사람이 되어 봉사 헌신을 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지 않는 사람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예배를 잘 드립니다. 전도하지 않던 사람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전도를 잘합니다.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카이노스’ 라고 합니다. 질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느 동화책에서 보니 돼지에게 사람의 옷을 입히고 넥타이를 매어 놓은 근사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돼지에게 근사한 사람의 옷을 입히고 넥타이를 매어 준다고 해도 돼지가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리가 양의 탈을 쓴다고 해서 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을 아무리 바꾸고 또 바꾸어 본다고 해서 근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근본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면 생각이 변합니다. 말도 변하고, 행동도 변합니다. 습관이 변합니다. 인생이 변합니다. 새사람이 되면 제일 먼저 생각이 새로워집니다. 새해엔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 담임목사 254-289-8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