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였다가 기독교 작가가 된 A. J. 크로닌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남들이 외면하는 광산촌에서 의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산촌에 한 그리스도인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 간호사는 쥐꼬리 만한 봉급을 받으면서도 아무 불평 없이 뭐가 그리 기쁜지 늘 웃으며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크로닌 박사가 보기에 하도 안쓰러워서 그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지닌 가치만큼 여기서 대우를 못 받고 있어요. 그걸 알고 있나요?” 그러자 그 간호사가 대답했습니다. “박사님, 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할까요? 저는 그냥 제가 살아 있고 그분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에요.” 가슴 뭉클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면 되었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성탄절 시즌이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입니다. 지난 1년을 뒤돌아보면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가?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써 아니면 한 인격적인 사람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우리가 안다면 그리고 믿는다면 우리도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 예수님의 오신 목적
예수님은 구약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심을 강조합니다.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2)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3)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시려고 4)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첫째,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수 하덕규의 ‘가시나무’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지금은 목사님이시고 신학교 교수이십니다. 시인과 촌장으로 가수로 활동할 때에 공연이 끝나면 찾아오는 공허감, 우울증을 이기려고 술과 대마초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술과 대마초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에 누님을 통해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욕심이 그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그의 노랫말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 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하덕규 집사님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난 후에 자기 안에 ‘세상을 살다가 험해지고 냉랭해진 수많은 자기 존재’를 가시나무 숲 같아 보였다고 고백합니다. 욕심과 욕망이 가득한 자신, 쉼을 얻지 못해 지치고 피곤한 자아(自我), 깨진 영혼의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누구도 다가올 수 없게 하는 자신의 상처난 모습,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주어 돌아서게 하는 나, 어둠과 슬픔, 우울이 가득한 나, 그리고 그날 밤, 그 가시나무 숲에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주님은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노래하던 외로운 영혼을 만나 주셔서 구원과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베푸셨던 것라고 고백했습니다. 훗날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했는데 조성모라는 가수가 리메이크해서 이 노래를 불러 더 유명해졌습니다.
그 때 조성모란 가수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그 노래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둘째,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 완전하게 사로잡혀 자유를 상실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에 포로 된 자, 질병에 포로 된 자, 마귀에게 포로 된 자, 사상에 포로 된 자, 자기 생각에 포로 된 자, 이런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 이십니다.
셋째,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눈 뿐만 아니라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인간은 원래 육신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육안(肉眼)과 영혼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마음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안은 영안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크게 육안과 영안으로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는 세상을 바라보지만 영적인 눈으로는 하나님과 천국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 눌린 자를 자유 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눌린 자’ 란 세상의 근심, 걱정 등에 얽매여 고통을 받고 있는 자들, 상처 난 자들, 마음이 상한 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고통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 참된 평안과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를 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들을 모두 그에게 내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나아와 우리를 누르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기만 하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질고까지 대신 져 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우리를 누르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기만 하면 우리는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과 새해를 맞아 여러분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 담임)254-289-8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