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 가면 비서새가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늘을 곧 잘 날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벌레를 잡기도 하고, 또 노래를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게 되면 날개가 꽁꽁 얼어붙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믿음 생활하는데 꼭 비서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감사도 하고 찬양도 하고 예배도 잘 드리다가도 어떤 위기를 만나게 되면 신앙생활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극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탄할 때는 그 믿음의 진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극심한 환란과 시련, 그리고 도전에 부딪혀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이 아들을 아낌없이 드림을 통해서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창 22:12) 믿음의 진가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을 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도 교회가 어려울 때에 나타납니다. 친구도 어려울 때에 구별이 됩니다. 노련한 등반가의 진가는 동네 뒷산을 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험난한 산을 오를 때에 비로소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뱃사공이 능숙한 사공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고요한 바다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날 때 비로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역사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둘로 나누어집니다. 북쪽은 10지파로 구성되고, 남쪽은 2지파로 구성이 됩니다. 북쪽을 이스라엘, 남쪽을 유다로 칭하게 됩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BC 722년에 멸망 당해서 절반 정도는 끌려가서 사방에 흩어진 삶을 살아야 했고요. 이것이 지금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 역사입니다.
반면 절반 정도는 앗수르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남쪽 유다는 BC 606년 1차로 바벨론이 왕족 귀족의 자녀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갑니다. 그리고 BC 597년에 2차로 이스라엘 백성을 또 포로로 잡아갑니다. 그리고는 BC 586년에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며 망하게 됩니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통치 11년 (BC 586) 아들들은 죽이고 시드기야왕의 두 눈을 빼고 쇠사슬로 묶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갑니다. (왕하 25장, 대하 36장) 그리고 BC 606년 1차로 잡혀간 사람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그들은 왕족이거나 귀족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은 정책적으로 바벨론의 교육을 받아, 바벨론의 고위 공직자로 발탁을 합니다. 일종의 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이지요.
2. 바벨론에서의 삶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자신의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육십 규빗이요, 넓이가 여섯 규빗이라(약 30m. 10층 높이).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자기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여하게 하매. 이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부갓네살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반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가로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단 3:1-4)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5-6절)
3.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왕이시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는 대답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우리를 풀무불 속에 던지시면 우리 하나님이 건져 주실 것입니다. 그리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금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 인간들을 굴복시킨 세 가지 힘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돈의 힘이요. 둘째는 권력의 힘이요. 셋째는 죽음의 힘입니다. 이 세 사람은 절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겁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타협하지 않는 믿음이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회유하며 말하기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단3:14) 이에 대한 청년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3:16)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준 믿음이였습니다. 그 어떤 논쟁이나 핑계도 하지 않고 일체의 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이지요. 말이 아닌 행동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을 보여주겠다는 태도입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였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단 3:17) 우리 하나님께서 능히 건져 내실 것입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믿음입니까? 정말 부럽지 않습니까?
셋째,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입니다.
세 사람이 가진 믿음의 클라이 막스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그분은 영원한 나의 믿음의 대상이 됩니다.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저기 이글거리는 풀무불 속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왕이여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우리가 풀무불 속에서 우리가 그대로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죽어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신앙고백입니까?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믿음을 본받아 지조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