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하면 스위스입니다. 1960년대는 스위스가 세계 시계 시장의 90% 가까이를 지배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두 명의 스위스 시계 기술자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시계를 발명해 냈답니다. 그런데 두 기술자의 신기술은 스위스에서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스위스의 시계 세계는 반응은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시계만으로도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데 무슨 디지털 시계입니까?’였습니다. 그들의 발명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그대로 안주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수없이 좌절을 거듭한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신기술을 미국의 인스트루먼트와 일본의 세이코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위스는 시계 시장의 8%만을 점유하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결과도 판이하게 달라지고,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달라져야 합니다. 아니 성장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장성한 믿음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장하지 않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신령한 자처럼 대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처럼 대한다’ 여전히 육신에 속한 어린 같은 믿음을 책망합니다. 이어서 히브리서에서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자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 한자’라고 말합니다. 체험적 믿음이 아니고 지식적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증거가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아벨부터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되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을 흉내 내는 사람은 다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역시 다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 그리고 믿음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아도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고 피느냐? 들판의 들풀을 보라. 아궁이에 땔감으로 쓰이는 들풀도 하나님이 나서 자라게 하지 않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있긴 하나 적다는 것입니다. 좀 더 큰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는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를 하든지, 미국 국내 선교를 위한 기도를 하든지, 지역 복음화를 위한 기도를 하든지 말입니다. 호랑이가 되는 믿음을 가져야 고양이라도 되는 것이지, 고양이 새끼가 되는 꿈을 꾸면 쥐새끼도 안 됩니다. 믿음을 크게 가지시길 바랍니다. 입을 크게 벌리시길 바랍니다. 째째한 믿음을 갖지 말고 말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책망이 아닌 ‘네 믿음이 크도다’하는 칭찬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믿음을 억지로 크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만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크기만큼만 축복해 주십니다.
2. 칭찬받는 큰 믿음 (마 8:6-13)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로마의 군인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기의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자. 내가 가서 고쳐주마.”라고 하시자 백부장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말씀만 하셔도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나도 위에 상관도 있고, 내 아래에 부하도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갑니다.”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1) 하인을 사랑하는 믿음. 그저 물건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명을 정말로 소중하게 여긴 백부장입니다. 2) 겸손한 믿음. 지배국의 군대 백부장입니다.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지역 사령관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나와서 간청을 합니다. 3) 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 말씀만 하셔도 하인이 낫겠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감동하셔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가진 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칭찬하십니다.
3. 왜 우리가 칭찬 듣지 못하고 책망을 받습니까?
1) 불평과 원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책망들은 이유는 믿음 대신 원망 불평을 했습니다. 홍해 앞에서도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까지 끌고 나와서 죽이려고 하느냐?’ 40년의 광야생활에서 10번의 불평하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축복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원망, 불평의 체질에서 감사의 체질로 바꾸어야 합니다.
2) 교만이 앞섰기 때문에 책망을 들었습니다.
믿음 대신에 교만이 앞서기 때문에 책망을 들었습니다. 웃시야 왕은 나라가 강성해지자 교만해져서 제사장이 해야 할 제사를 자신이 드렸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분향단에 분향을 합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서는 죽는 날까지 문둥병으로 고생하게 하고 문 앞에 나오질 못합니다. (대하 12:16) 낙타는 짐을 실을 때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낙타는 짐을 내릴 때도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교회 앞에서 사람 앞에서 겸손과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이 많은 부하를 거느린 것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의 지휘 솜씨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의 겸손함에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감동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세로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 감동하실 것입니다.
4. 우리에게 필요한 이런 믿음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라는 것은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상과 목표를 다 이루어진 것처럼 실상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믿음은 바라는 것을 믿음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바라보십니까? 믿음의 그림을 그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피부로 느끼시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