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어린 아이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멀리 멀리 돌아다녔습니다. 여기 있을 것 같아 찾아갔지만 그곳엔 행복의 파랑새가 없었습니다. 저기 있는 것 같아 달려가 보았지만 행복의 파랑새는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섰던 이 두 어린 아이는 끝내 찾지 못하고 실망한 나머지 맥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행복의 파랑새는 바로 자기 집 처마 밑에서 즐겁게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멀리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행복은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행복이요, 우리의 가족이 행복이요, 우리의 교회가 행복이며, 나의 직장이, 나의 사업장이 행복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라면을 먹으면서도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스테이크를 먹으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은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입니다.
1. 행복이 무엇일까?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을 하는 것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열심히 돈을 버는 것도 행복해지려고 그렇습니다. 권력을 잡으려고 동분서주하는 것도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지요.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도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엔 행복한 사람들보다는 불행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2. 행복에 감염된 바울
빌립보서에 나타난 바울은 자유가 없는 차디찬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행복해 합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합니다. 무려 16번이나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기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뻐하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누가 뭐라고 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의 근원자인 예수님에게서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면 바울이 불행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가장 행복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행복의 비밀 두 가지만 찾아보려고 합니다.
3. 행복의 비밀은 ‘만족’입니다. (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나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래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자족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풍족한 환경에서도 원망 불평 가운데 삽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오히려 감사하며 행복을 느낍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만족하느냐’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느냐’입니다.
왜 만족하지 못합니까? 끝없는 욕심입니다. 본능적으로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더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입니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인간의 욕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합니다. 내일을 향해 도전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이 필요 이상으로 지나칠 때 문제가 됩니다. 절제가 되지 않을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5절에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 내면에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탐심을 절제하지 못하면 곧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은 바다와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넓은 욕망의 바다에서 짜디 짠 바닷물을 벌컥벌컥 마십니다. 그러나 마실수록 더 짜서 또 마시고 또 마시고 한없이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만족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불행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족에 있습니다. 자족하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1) 다윗이 이런 고백을 드렸다고 해서 그의 삶이 평탄하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는 시편 23편을 쓸 때 가장 어려운 인생의 시련에 직면했습니다. 사울 왕에 의해 죽음의 그림자를 밟으며 좇기는 상황입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삶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하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 있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의 자리는 힘들고, 죽음의 공포가 가득했지만 그는 항상 주님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얼마나 행복한 사람의 고백입니까?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