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사회발전 연구소가 전국의 20살 이상 된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평균 66.5점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행복한 삶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약 70%가 건강을 꼽았습니다. 다음이 경제력(약11%), 사랑(6.5%), 신앙(5.2%), 안정된 직장(2.8%) 순 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행복한 삶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여기십니까? 통계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보다 건강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기의 꿈을 성취하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행복의 조건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의 절대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라별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반대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라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득이 5만 불이 넘는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였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200달러요, 인구 밀도는 세계 1위입니다. 문맹률이 90%가 넘고, 매년 홍수로 국토의 80%이상이 물에 잠깁니다. 천연자연도 없고, 교육 시설이나 의료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습니다. 사회는 양극화 되어있고, 뇌물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직장도 없고, 공부할 학교도 없고, 아파도 찾아갈 병원조차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진정 오늘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결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는 심리적으로 더 불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살률이 오히려 높습니다. 행복은 경제적 조건이나 환경과 비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인생의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내린 인생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전도서 1장 2-3절을 보십시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그리고 8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서 세상 모든 낙을 다 누려보았지만 그 모든 것이 피곤함 뿐이요, 만족함이 없는 세상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내린 마지막 결론은 인생은 ‘헛되다(nothing, meaningless)’는 것입니다. 결국 해 아래서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몸부림치고 수고했지만 그 결국이 헛된 것이라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일까요?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나의 위로자가 되는 사람입니다. (1-3)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은 광야의 사막과 같습니다. 우리는 시온의 대로를 달려가기를 원하지만 우리 인생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모래바람 부는 사막에서 목말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전갈과 불 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길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순간 마라의 쓴 물을 마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큰 아픔과 고통도 있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이지만 우리를 또한 힘들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사막을 걸어갈 때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일까요? 사막의 카라반(낙타타고 다니는 상인)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모래바람도, 뜨거운 태양도, 목마름도 아니랍니다. 신발 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모래 알갱이랍니다. 처음에는 모르지만 이 작은 모래가 발을 부르트게 하고, 결국은 쓰러지게 한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 학대받는 자를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컸던지 사는 것보다 죽은 자를 부러워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볼 때 더 안타까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때로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순간에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인생의 친구가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 군중 속의 고독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그리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힘들고 지칠 때 위로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정말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눌 친구가 필요합니다. 나의 아픔을 쏟아 놓았을 때 포근히 덮어주고 치료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런던 타임즈’가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현상 모집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 셋을 뽑았습니다. 친구란 무엇인가? 그 첫 번째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그때에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에 그 말없는 말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세 번째는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쁨이 배가 되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친구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친구, 즉 내 삶의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아픔을 함께 겪으시며 위로해주십니다. 성령님의 위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복현 목사 (킬린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254-289-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