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히 무자비하고 멍청해 보이는 우주에 쏟아 내는 선한 무신론자의 저항은 사실상 한없이 소중하고 믿을 만하다고 인정하는 무언가에 바치는 무의식적인 존경의 표현이다. 만일 사랑과 정의가 인간 개인을 넘어서는 객관적인 근거 없이 오로지 자신의 사사로운 기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가 그것을 깨닫는다면 무신론자는 화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이 사랑과 정의를 외면한다고 규탄하는 것 차체가 더 높은 하늘에 사랑과 정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C. S. Lewis, 「Christian Reflections」, pp. 69-70.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p. 168에서 재인용)
영문학자 C. S. Lewis를 인용했다. 그는 9살 때 목사님의 딸인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신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많은 고통을 안고 살았다. 손가락 마디가 온전치 못하게 태어나 손으로 잘 하는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었다. 그의 많은 저술들은 형이 타이핑을 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1차 대전 때 그는 친구들과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다. 거기서 그의 눈 앞에서 많은 친구들이 죽자 그의 사고(思考)는 신의 부재를 택하는 쪽으로 완전히 가닥을 잡았다. 정녕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에게 이같은 악과 고통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게 만든 그것이 훗날 그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었다.
악이 신의 부재를 증명한다면, 악을 악으로 정의할 수 있는 근거를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마다 제각각 악을 정의한다면 어떻게 히틀러를 틀렸다고 재판할 수 있을까? 악을 악으로 인식하려면 위로부터 주어진 윤리 의식이 인간 안에 스며들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pp. 169-170). 신이 없다면 온갖 형태의 악과 고통, 즉 폭력, 역경, 죽음 등에 대해 분노할 이유가 없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강한 것은 약한 것들을 철저히 찢고 해한다. 자비도 긍휼도 거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약육강식만 존재한다. 루이스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악을 허용한 신이 있다면 신일 수 없어!’ 하며 삿대질한 그 손이 신의 존재를 가장 강력하게 고백하는 것이라고….
팀 켈러의 「고통에 답하다」는 총 3부로 구성되며 각주를 포함하면 분량이 540쪽이 넘는다. 1부는 고통을 해석하는 다양한 역사적인 시도들과 그들이 제시한 처방들을 소개한다. 2부는 성경은 어떻게 답하는가? 마지막은 어둠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주는 실제적 메시지다. 신학적이라고 하기에는 가슴을 뜨겁게 하며, 감성을 자극한다 하기에는 책의 지적 무개가 결코 가볍지 않다. 금주에는 1부의 중요 내용들을 소개하려 한다.
- 현대 문화와 고난
현대인들에게 고난 또는 악은 있어서 안될 인생의 불청객들에 불과하다. 최대한의 자유와 자아성취를 통한 행복 추구를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난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기에 고난은 어떻게 하든 피해야 할 대상이다. 정 피할 수 없다면 힘 닿는 대로 축소를 하든 무시해야 한다(pp. 42-43). 만약 고난이 사회적인 문제라면 그런 세상을 향해 분노하며 뒤집어 엎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만약 개인적인 분야라면 이런 문제들을 대신 담당해 줄 전문가 대리인을 구하면 된다. 해결사들은 ‘스트레스나 긴장을 줄이는 방법을 권하고, 트라우마를 관리하기를 강조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통은 인간의 내면 세계와 외부세계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증상이다. 어려움을 겪는 이의 행동과 생각이 바뀌거나 환경이 변하거나 아니면 둘 다 바뀌어야만 한다. 고통스럽고 불편한 감정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그런 감정이 내 삶에 어떤 이야기를 건내는지, 어떻게 변화를 받아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려면 당연히 도덕적이고 영적인 기준이 있어야만 했다 가치판단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분의 나라를 세워 가신다는 하나님 임재의식을 상실하고 인간이 주인되는 역사를 세우려는 관념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p. 48). 하지만 날마다 말씀 먹는 성도는 오늘을 살지만 영원을 살고 있는 후자일 것이다. - 한 시대 안에 두 사상
복음이 로마 세계 안에서 확장되어갈 즈음 헬라의 지성인들은 철학을 신앙 삼아 고통과 죽음에 맞서는 가당치 않는 줄다리기를 하던 중이었다. 우주에는 만물을 지배하는 질서, 절대적인 기준, 이성을 상징하는 로고스가 존재하며 합리적 이성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때로는 세상이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 차 보여도 본질은 완벽한 것이므로 인간은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했다. 세상이 인생에 무엇을 보내주건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어떤 운명적 사건도 완벽한 질서인 우주가 보낸 것이므로 결국에는 유익할 것이라 생각했다. 바람직한 삶이란 희망도 두려움도 초월하는 것이다. 잘 살고 싶다면 이성적인 토대 위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희로애락에 빠지지 말아야 했다. 인간은 죽음을 통하여 구원, 즉 마침내 만물의 생성원리, 로고스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p. 66).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당대의 철학자들보다 단연 열등 했지만 그들의 믿음은 당대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대하게 했다. 세상은 비인격적인 이성이나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무수한 신들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그 분의 주관 아래 있는 것이다. 불행이나 죽음, 불행은 그저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할 운명도 아니었다. 범죄의 결과이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만 회복된다면 에덴에서의 삶과 같은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다 믿었다. 또한 요나나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같은 고난도 인간의 성장을 위한 신의 사랑의 섭리 중의 하나였으니 지극히 환영하고 기뻐할 대상이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당대의 그 어떤 철학보다 참으로 독특했다. 사람들은 죽음으로서 인간 영혼은 개인의 개성이 사라진 비이성적인 로고스로 회귀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은 각 개인마다 명징한 의식을 가진 육체로 다시 산다고 믿었다. 부활은 사랑하는 사람과 재회하는 순간이며 모든 소망들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로고스 곧 우주적 질서는 인간들이 이성과 사색을 통해서 깨닫고 그저 순응하며 받아들여야 할 대상도 아니었다. 성경이 말하는 로고스는 인격적 존재로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를 사랑하며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 악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전능한 사랑의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의 불행과 악은 존재할 수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성립되려면 먼저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악을 허용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악의 존재가 신은 부재의 증명하는 가정으로 과연 합당한가?하는 점이다.
1974년 알빈 플란팅가의 「God, Freedom, and Evil」 이 출간되면서 악의 존재가 신의 부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다. 악의 현존이 악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보다 더 나을 수 있다. 게다가 무용지물처럼 생각했던 악도 전능한 하나님께는 꼭 필요한 것일 있음이 요셉의 일생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곳에는 악과 고난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어떤 모순도 보여주지 않는다(p. 157).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악과 고통을 허락하고도 남을 충분한 이유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도 믿어야 한다.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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