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일어나는 악에 대한 분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본래부터 인간이 유한하게 설계되지 않았고 사랑을 잃거나 어둠이 승리하도록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직관이다(p.181).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동행하시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걷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가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삶이 망가지는 순간마다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여길 것이다(p.369).
이곳저곳에서 그냥 아무렇게 던져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단구(短句)들이 평소 속으로만 굴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던 생각들을 명쾌하게 조각해 낸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악에 대해서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두 번은 누군가로부터 받아왔을 질문이다. 범인들에게는 화두의 수준인데 저자는 앞의 인용구로 답한다. 원래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는데 그런 것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의 인간을 지으시고 에덴 동산에 살게 하실 때만 해도 죽음이나 악은 인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악과 죽음은 범죄의 결과이다. 난해한 신앙적 질문들을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하는 그를 ‘언어술사’라고 하면 어떨까? 지난 번에 언급한 바지만 책의 분량도 그러려니와 내용의 무개로 인해 <고통에 답하다>를 한 번 더 이야기하려 한다.
- 하나님께서는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
고난과 죽음은 죄의 결과이고 공평하신 하나님의 심판인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역경을 겪는 사람들마다 그들이 범한 특정한 죄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욥기가 잘 보여준다. 친구들은 욥에게 임한 재앙이 그가 남들보다 더 큰 죄를 지은 탓이라고 정죄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 친구들의 말은 틀렸다고 지적했다. 욥이 아담의 후손으로 죄를 물려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하나님도 인정했던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의인이었다.
선하신 신이라면 왜 악과 고난을 인간들에게 허락하시는가 라고 따지기 전에 이런 생각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나님이 우주의 주인이신데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이신론(Theism) 등장했던 18세기 이전만 해도 신을 향해 인간 중심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악한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에게, 특히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안락하고 평안한, 소위 복된 삶을 보장해 줄 책임이 신에게 있다고 하는 강력한 암시를 받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 얼마나 부당한 생각인가! 도리어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깊이를 이해한다면 도리어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행복을 허락하시는가!” 감격해야 하지 않을까?(pp.182-183).
저자는 ‘어떤 이론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을 허락하신 이유를 완전히 납득시킬 수 없다’(p.185)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떤 악과 고난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이 성경 안에 있음을 강조한다. 먼저는 심판과 부활의 믿음이다. 심판이 없다면 자신이 받은 악은 스스로 심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권한인 심판자의 자리에 서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또 하나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 고난을 당하신 하나님이다(p.189).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을 끝내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모른다. 선한 사람들이 악인들에게 고통 당하도록 방관(?)하는 이유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돌보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당할 고통의 자리에 오셔서 온갖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셨다. 만약 그분께서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악인들을 보이는 대로 족족 처단했더라면 악인의 심판을 간구하는 자들 역시 그 분의 처형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p.196).
어린 자녀는 부모의 깊은 마음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지 않거나 불신하지도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들은 부모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고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원하신다. 하나님도 악은 원치 않으신다. - 악은 하나님도 가증하게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나날이 질서를 잡아가는 세상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좋았다’고 거듭 감탄하신 분이다. 이런 세상에 악과 사망이 들어왔다. 정의가 사라졌고 평화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주님께도 이런 세상은 밉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자들을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계신 지를 확인할 수 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무덤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을 주목하자.
(요 11:38, 개정)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비통하다’는 흔한 슬픔 정도로 이해하지 말라. ‘엄청난 분노로 주제할 수 없어 큰 소리를 지르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괴성을 지르신 것이다. 무엇을 그리 분노하셨을까? 어차피 죽은 나사로를 살릴 생각을 하고 그 자리에 서셨을 텐데 왜 불같이 분노하셨는가? 저자는 칼빈을 인용한다.
마리아와 그 일행들이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격노했다. … 마리아의 비탄을 보시며 주님은 “온 인류의 보편적인 참상을 깊이 묵상하시고 인간을 억압하는 주체를 향한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셨다.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가 예수님을 사로잡았다. … 진노의 대상은 죽음, 그리고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다시 말해 주님이 멸망시키러 세상에 오신 상대였다. 연민의 눈물이 두 눈에 가득했을 지 모르지만 그건 부수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주님은 (사망, 곧 원수 마귀와) 한 바탕 전쟁을 치를 준비를 갖춘 챔피언처럼 무덤으로 다가가셨다(p.217 재인용).
주님은 죄와 악, 그 근원을 심판하러 오셨다. 그 악과 사망이 사랑하는 자를 사로잡아 결박해 놓은 것을 예수님은 보셨다. 주님은 견딜 수 없으셔서 폭팔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악의 근원과 너무도 근접해 있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을 심판하는 대신에 그 죄 값을 대신 지불하기는 방법을 택했다. 그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다 용서해 버린 것이다.
- 어떻게 그러기까지 하실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에서만 신이 스스로 고난을 받으셨다고 가르친다(p.233). 그것도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 일을 위해 역사의 주인이신 그 분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애가 타도록 사랑하시는 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들은 이것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나도 나 자신이 꼴보기 싫어 죽을 지경인데…’ 자신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하물며 나 아닌 다른 존재가, 그것도 창조주라고 하는 분이 당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인간들을 사랑한다고 하니 믿기지 않을 수밖에. 하지만 자녀를 낳아 키워본 부모는 안다. 자식이 병들고 아파 신음할 때 당하는 그 애절한 마음을 낳은 부모는 안다.
(렘 31:20, 개정)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모든 것에서 냉담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무능하고 차가운 이성이 만들어 낸 신이다. ‘플라톤 주의자들이 말하는 절대자’(p.240)가 그러했고, 고통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그저 해탈해야 한다고 하는 신은 아니지만 신같은 이의 말이다. 그렇다. 그런 신들은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과는 무관하다.
그 아버지가 당신에게는 있는가?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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