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목사의 저술들 10여 권을 연이어 소개했다. 오늘 다룰 책은 최영기 목사님의 <답은 고린도에 있다>이다.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장별로 설교한 것으로 수많은 설교집들 중의 한 권 정도로 생각하고 책을 펼쳤다가 몸과 마음 자세를 곧게 세우기까지는 오래 가지 않았다.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활자 하나하나가 생명으로 강력한 말씀의 검으로 다가왔다. 읽다가 책을 덮고 감격했고, 다시 펴서 보다가 탄식의 깊은 숨을 내쉬기를 거듭했다. 이런 목회관을 갖고 계셨고 또 양들에게 이런 말씀을 먹이셨기에 주님께서 당신의 종을 통하여 저런 아름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었겠다 싶었다. 감동이 사그라지기 전에 누구나 읽었으면 바램에서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배경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신약 성경 시대의 고린도는 지중해 안에서 가장 유명한 항구 도시들 중의 하나로 뱃사람들과 거대 재벌들로 들끓었다. 아프로디테 신전은 해운의 안전을 빌며 기업의 번창을 비는 예배자들로 늘 들 끓었고 천 명도 더 되는 신전 창기들이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았다. 때문에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음란하다’를 ‘고린도 사람처럼 행동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타락과 방탕의 도시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때이다. 로마 출신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 교회를 개척하여 1년 6개월 정도 사역했다. 교인들이 초신자들이라 경제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탓에 바울은 본업인 텐트 제작업을 통해 생계를 꾸렸고 이를 알게 된 빌립보 교회가 수차례 후원금을 보내 그의 사역을 도왔다. 교세가 늘어감에 따라 유대인들의 반발이 점차 거세지게 되었고 결국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바울의 공백을 아볼로가 채워주었고(행 18), 이후로도 여러 교사들, 그들 중의 몇몇은 사도들이 서명한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사도란 예수께서 친히 부르신 이들인데 바울은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교회를 크게 박해한 전력까지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한술 더 떠서 바울은 자비량 선교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바울의 사도권이 부정 당하자 그의 가르침도 권위를 잃어갔다.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좋아하는 교사들을 중심으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등으로 분열되었다. 게다가 바울을 비난하는 나쁜 소문들이 번져 나갔다. 그런 고민 가운데 쓰여진 책이 고린도 전후서이다. 많은 내용들 중에 세 가지만 소개한다.
- 지도자는 존중하되 예수님은 사랑하라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교회가 분열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 목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며, 목(회)자란 그분의 종이며 대리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전 목(회)자를 연연하여 새로운 리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지도자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새롭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p. 19).
사람마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들이 조금씩 다를 수가 있다. 어떤 리더는 자기가 생각하는 리더의 상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라면 우리의 판단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놀랍고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오셨다. 그래야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대할 때 이 두 가지 질문을 해 보는 것이 좋다.
“이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시는 분인가?”
“이분이 기도하는 분인가?”(p. 21).
이 기준들에 어느 정도 맞는 사람이라면 믿고 따라주는 것이 좋다. 이는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 영적인 사람이란?
영적이란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민감한 것을 말한다(p. 33). 어떤 이들이 영적인 사람들인가? 이 책에서는 세 가지 특징을 나열한다. 첫째, 하나님의 종을 존중한다. 믿지 않는 이들은 영적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또한 사역자들에 대한 존경심도 없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에게 물 한 사발이라도 대접하면 천국에서 상급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마 10:42).
둘째,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해 일한다. 바울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에 복음을 증거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 그는 교회가 세워지면 후임에게 맡이고 또 다른 사역지를 찾아 나섰다. 이때 바울이 특별히 강조한 것이 있다. 교회는 순수한 십자가 복음 위에 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각 시대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일제 때는 독립 운동의 기지가 되었고, 군사정권 때는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핵심에 있었고, 오늘날에는 통일을 부르짖은 일에 앞장을 서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복음을 대체해서는 안된다. 교회란 영원히 남을 일들, 곧 영혼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p. 37-38).
셋째,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교회를 박해하는 바울에게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신 것에서 주님은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을 본다(행 9:5). 자신의 부주의한 언행이 연약한 이들을 실족 시킴에도 절제가 없고, 어린 자녀들이 교회에서 소란을 피우고 벽에 낙서를 해도 방치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영적인 사람은 교회의 수치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p. 41). - 좋은 목(회)자란?
고린도 후서 10, 11장을 통해서 이 주제를 다룬다. 세상 리더는 힘과 위압감으로 리드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온유와 부드러움을 하나님의 양무리를 이끌었다. 구약 성경에서 온유의 대표자가 모세다(민 12:3). 신약에서는 예수님이며(마 11:29) 바울도 그러하다(고후 10:1, 10).
온유란 자신의 파워를 이기적 목적이 아닌 이웃을 위한 섬김에 사용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이라도 내려와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조롱했다. 그는 천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한 순간 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묵묵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었다. 성도가 온유 하려면 먼저 힘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성도는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얻어진 힘과 영향력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형제 자매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주님은 그런 온유한 이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p. 275).
또한 리더는 공동체를 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도전한다. 때로는 모르는 척 해 줄 수도 있고, 또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줄 필요도 있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 주님의 공동체를 해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두려움에 침묵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쓰실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잘못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바로잡아 줄 것을 권한다(갈 6:1).
좋은 리더는 좋은 팔로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과 잘못이 있다. 남의 허물을 보는 족족 트집을 잡고 물고 늘어진다면 누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있고,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닮아가려고 한다면 믿고 따라주어야 한다. 그게 자신을 위해서도 유익하다(히 13:17). 좋은 목(회)자란 좋은 팔로워인 동시에 좋은 팔로워와 함께 하는 사람이다(p. 287).
세상은 강한 것들은 자랑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감춘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반대이다.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바울은 사역하다가 도망친 이야기들, 망신당했던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공개했다(고후 11:30; 32-33). 책 잡힐 위험도 있었을 것이나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 큰 일을 이루어 내고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 힘의 근원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게 된다(p. 290).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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