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 중반에 이 책을 읽은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저 단에 서서 자신이 연구한 성경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다 설교인 줄 알았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안타깝다. 하지만 이제라도 눈을 뜰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복된가? < 팀 켈러의 설교 > 를 읽어본 설교자라면 필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림 짐작은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은 많은 훌륭한 책들이 출간되었을 것이나 80년 중후반만 해도 설교학 분야는 변변한 교재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2015년에 출간된 저자의 < 설교 >는 이 분야에 있어서 걸작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총 세개의 장(chapter)로 구성되는데 제1장은 성경(text), 2장은 청중의 삶의 정황(context), 3장은 설교자의 내적 동기(subtext)를 다룬다. 이에 각 장을 중요 내용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Text(성경)과 청중
설교자는 설교 행위를 통해서 두 가지를 위대한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긴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설교자는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굴하는 자들이다. 바울이 사역하던 때는 구약 성경만 있었다. 그는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전 2:1-2)고 했다. 이는 곧 그가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의미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향하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의 스펄전은 ‘모든 설교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그분을 높여야 한다. 아무리 지적이고 웅장해도 도덕적인 진리와 윤리적 실천으로만 채워져 있다면 청중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사랑하거나 순종할 수가 없다’고 했다. 즉 구약 성경의 중요 사건들이나 등장 인물들, 선지자, 제사장, 왕들은 진정한 ‘왕이요 선지자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소재들이라는 것이다(p 29). 그 일부를 인용한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되었다(요 1장). 이는 훗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새 창조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과 시련을 통과하셨다. 그래서 인류의 타락 이야기는 훗날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과 시련의 성공적인 통과를 가리킨다. 출애굽 이야기는 훗날 예수님이 그분의 죽음으로 그분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진정한 출애굽을 가리킨다(눅 9:31)…. 예수님은 문자 그래도 참 이스라엘, 그 “씨”이다(갈 3:16-17). 그분은 언약에 신실하신 유일한 분이며 한 명의 남은 자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출애굽을 말할 때 “내가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호 11:1)고 했다. 호세아는 전체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태는 이 구절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한다(마 2:15)(pp. 117-118).
현대인들에게 이런 사고는 논리의 비약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그림자라는 확인을 가진 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표시하는 방편으로 강해 설교를 추천한다(p. 53). 설교자는 오직 말씀의 권위에 자신을 맡기고 본문을 따라 본문이 말하는 진리가 강단에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본문이 속한 문맥을 파악하고 앞뒤 주제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이런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가 본문 속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는 원하는 주제만 설교하려는 설교자의 취약성을 보완해 줄 수 뿐더러 청중들에게도 스스로 성경을 읽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 Context 이해: Post-Modernism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시대 정신의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저자는 책의 상당한 분량을 이 주제에 할애한다. 지금 이 시대 정신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최종 권위자’(p. 164)인 시대이다. 전통과 종교적 믿음이 진리의 기준이 되어 주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계몽주의 등장 이후 인간은 외적인 도움 없이 이성만으로 참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더 나갔다. 2차 대전 이후 인간은 도덕과 윤리, 진리 등을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미국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낙태논쟁’(Planned Parenthood vs. Casey)의 대법원 판결에서 이같은 변화가 잘 나타난다.
“자유의 핵심부에 하나의 권리가 있다. 이는 존재에 대해, 의미에 대해, 우주에 대해, 인생의 신비에 대해 우리 각자가 그 개념을 정의할 수 있는 권리이다.”
즉 인간 개개인이 각자가 자신의 의지와 자유를 가치들을 스스로 구축해 가야 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 더 나은,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종교는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인간 의지를 방해하고 함께 일하지 못하게 한다(p. 167).
하지만 신이 부재하다고 할 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생각해 보았는가? 다양한 화학 물질들이 우연히 충돌하여 생성된 화학 반응의 결과가 그대와 나다. ‘나’와 ‘너,’ ‘우리’란 먼지요 유기물질의 조합에 불과하다.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이란 것도 그저 호르몬 작용일 뿐이며, 진화의 과정 속에서 종족을 유지하며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한 생성된 본능이다. 과학이란 그저 차갑고 거대한 메커니즘에 불과한 우주의 규칙성을 해명하는 방편일 것이다(p. 169). 인간은 저마다 허허벌판에 홀로 서서 자신과 주위의 모든 의미와 가치들을 세워 가야만 하는 외롭고 피곤이 가득한 존재들이다. 아!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줄 알고 이 길을 걸었건만 천형을 짊어진 오갈 곳 없는 모습으로 선 것은 어찜인가? 그렇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야 말로 최고의 속박인 셈이다.”
이런 약점이 훤하게 보이지만 이 시대 속에 기독교인들은 마치 역사를 역행하는 미련한 자들처럼 취급되고 공격하는 저들은 한없이 당당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겁먹지 말자. 포스트 모던에 젖어사는 현대인들이야 말로 진정한 희생자들이다. 헬라의 지성인들에게 바울의 복음은 정신 나간 소리였다. 사도행전 17장의 아테네의 최고 지성인들인 아레오바고의 멤버들은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조롱했고 멸시했다. 그럼 지금 그들의 지혜는 어디로 갔는가? 그들이 믿었던 세계관을 지금도 믿는 이가 있던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 철학은 일어났다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 무궁할 것이다(p. 210). - Subtext: 메시지 내면에 흐르는 동기
말씀 선포에는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만 한다. 설교는 글이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 사로잡혀 하나님의 입이 된 이들이다. 조지 휫필드가 그의 설교를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천둥과 번개를 지면에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고 했다. 그는 변변치 못한 설교문을 갖고 위대한 설교를 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해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하노라”(골 1:25-29). 그렇다면 성령이 설교자를 통해서 일하시게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
설교자의 경건과 인격이다. 이는 성령의 역사 없이는 자연적인 인간 안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은사와 재능은 설교자가 미성숙해도 심지어 심각한 죄를 범하는 중에 있어도 발휘될 수 있다. 추문이 탄로가 날 때까지 많은 설교자들이 유능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하지만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는 운행했지만 그 물에 하나님이 자신이 참여하지는 않았다”(p. 260). 하나님과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만 성령은 설교자를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내면의 동기는 무엇일까?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만 영광!)(p. 273)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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