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가 쓴 10여권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왔다. 단연 최고라며 엄지척 한다면 두 권을 들 것이다. [하나님을 말하다]와 지금 소개 하려는 [인생 질문]이다. 예정대로라면 피터 스카지로의 [정서적으로 건강한…] 씨리즈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책의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글로 남기고 싶었다.
원재는 [Encounters with Jesus]로 옥스포드와 하버드에서 행했던 강의와 토론을 엮은 것이다.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2부는 예수님의 성육신에서 승천까지의 복음의 핵심이 되는 중요 사건들을 다룬다. 1부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인물들에게 일어났던 변화들을 소개한다. 어떻게 보면 1부와 2부의 순서를 뒤집어도 좋았을 뻔 했을 것 같다. 중요한 내용 몇 가지만 살펴보자.
- 트릴레마(trilemma)
말 그대로 세 가지 딜레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세 종류를 소개한다. 복음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놀랍도록 아름답고, 독특하며, 고상한 윤리들로 가득 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성인으로, 기독교 창시한 위대한 인물로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셨는지 조금만 생각을 한다면 전혀 다르게 반응해야만 한다. 예수는 자신을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종교의 창시자들, 혹은 위인들의 주장들과는 궤가 다른 것이다. 그들 중에 누구도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의 뜻을 소개하는 자로 또는 신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 등을 설파하는 자로 서 있다. 그게 그들의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예수는 달랐다. 그런 예수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란 다음 세 가지뿐이다. 예수를 정신병자로 보거나, 아니면 사기꾼, 아니면 정말 그의 주장하셨던 대로 신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가르침이 아름답고 위대하다는 등의 헛소리를 걷어치우고 얼른 피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를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이다. 얼른 예수를 주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혹자는 예수님은 스스로를 그렇게 주장한 적이 없었고 후대에 그렇게 가르친 것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 배경사를 조금만 알아도 이런 주장이 무지의 표현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약 성경들의 기록 연대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과 그다지 멀지 않다. 예수의 영원전 선재(先在)와 신성을 찬양하는 빌립보서는 예수님 사후 아직 20년이 지나지 않았다. 학자들은 바울의 빌 2장의 5-11을 초대 교회의 찬송가로 본다. 즉 바울이 서신을 기록하기 훨씬 전부터 성도들은 예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따랐다는 증거이며 이 믿음이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다(p. 81).
고의적 사기꾼은 아니지만 정말 스스로 신이라고 믿었다면 어떨까? 이 또한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1세기 그들은 하나님을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로 그 분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다.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은 그들의 상상 밖이었다. 그래서인지 1세기 유대에 허다한 거짓 메시아들이 등장했음에도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떠들어댔던 이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신인’(God-man) 개념이 없었기에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면서 하나님은 유일하시다고 믿는 유대인 무리들이 1세기에만도 무섭게 늘어났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예수님께서 죽음을 몹시 두려워했던 이유
죽음을 담대히 맞섰던 이들이 역사상 의외로 많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살 자리를 마다했던 소크라테스가 그러하거니와 예수를 따랐던 자들 중에도 허다하다. 초대 교회 집사님들 중의 한 분인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기 직전 얼굴이 천사 같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위해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로마 제국이 박해를 하던 시기에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와 폴리캅의 순교 이야기 역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 앞에 살 수 있는 구멍이 열려 있었지만 담대히 죽음을 선택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이들의 주가 되셨던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음을 맞았다. 예수님은 앞두고 두려움과 고통, 심지어 그 잔을 피해 보려고 몸부림을 쳤다. 왜 그랬을까? 답은 그분의 죽음은 단순히 목숨이 끊어지는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 분의 죽음은 인간의 불의와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법적인 진노를 대신한 것이다. 이는 순교자들이 죽음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했던 것과는 전혀 성질이 달랐다. 그분은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잔혹한 심판의 진노를 받으셨기에 버림을 받았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셨던 것이다. 순교자들은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안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원한 부재, 유기(遺棄)를 받으셨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이 살 수 없게 창조되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그분의 임재를 온전히 누리도록 지어졌다. 믿지 않는 자들 역시 세상 사는 동안에는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p. 204). 그런데 예수께서는 가장 두려운 순간에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께서 기도하시던 때를 떠올려 보시라. 아버지와 함께 있으려고 동산을 찾았는데 천국 대신 지옥이 앞에 열렸다. 그곳엔 하나님 아버지가 없었고, 그 분의 임재가 없었고 어떤 교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 있으셨는데 그 순간에는 단절과 부재, 격한 하나님의 분노를 경험하셨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힘쓰다는 사투를 뜻하는 헬라어 ‘아고니아’이다. 땀이 핏방울같이 되었다. 즉 땀에 피가 섞여 나왔다. 사람이 큰 충격을 받으면 실핏줄이 터져는 수가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 되셨던 것이다. -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올리셨다
이는 땅에서 천국으로의 고도 변화가 아니다. 이 동사는 ‘대관식’(coronation)을 통하여 법적으로 왕위를 승계했다는 개념이다. 온전한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신 그분이 하늘과 땅의 만왕의 왕으로 좌정하러 가셨다. 고대 시대에 ‘왕의 우편’에 앉은 이는 왕을 대신하여 왕권을 행사하여 실제 법과 정책으로 통치했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여 통치를 시작하셨다.
이는 그가 세상에 계실 때에 시공의 한계 안에 있으셨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 베드로와 함께 계시면 저곳의 그녀와는 무관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인간이시며, 대언자시지만 한없는 영광 중에 우주적 규모로 존재하신다(p. 228). 여기 계시나 저 곳에도 계시며, 지금 이곳에서 일을 하시면서 저 곳에서도 그러하시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을 붙들었다. 그때 주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 아직 내가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다”(요 20:17)라고 하셨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는 손가락과 손을 각각 당신의 구멍 난 손과 허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셨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힘껏 붙잡았다. 왜 그녀는 그리했을까? 다시는 이전처럼 예수님을 허망하게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올라 가셔야만 했다. 그래야 베드로나 요한 옆에만 계시지 않고 볼품없는 마리아나 우리들과도 영원히 함께 계실 수 있으실 것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이곳에서 죽음 이후까지, 어둔 지하 감옥에서 영광의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 나와 그대 같은 볼품없는 자에게도 그 분은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으시려면 올라 가셔야만 한다.
“마리아야. 나를 잡지 마라!”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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