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탕한 선지자]라니 참 발칙한 책 제목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어떻게 방탕할 수가 있지?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 이가 있다. 이 책은 1981년, 1991년, 2001년 총 세번이 걸쳐 전했던 요나서 강해를 발간한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지자 요나를 통해서 ‘요나보다 더 크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를 증언한다(마 12:41).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요나의 간단한 배경을 알아보자.
- 요나서의 배경.
그는 북 왕국 여로보암2세 때(B.C. 793-753) 활동했다(왕하 14:25). 사마리아에서 북쪽으로 600마일 떨어진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증거했다.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예언일지라도 선지자들은 현 거주지에서 예언을 했지만 그만은 예외였다. 그는 그곳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앗수르 인들은 잔인하기로 유명해서 주변국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전승 기록들은 증명한다. ‘그들과 싸웠던 나라들의 평원은 시체로 가득 찼고 도시는 완전히 불태웠다. 특히 살만에셀 3세 (Shalmaneser III: B.C. 858-824)는 패전국 사람들을 고문하고 사지를 절단하였으며 참수하는 장면들을 커다란 돌기둥에 부조로 남겨놓았다. 두 다리와 한쪽 팔을 잘랐는데 한쪽을 남겨 둔 이유는 그 손을 잡아당기며 죽어가는 자를 조롱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희생자의 친구와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잘린 머리를 장대에 매달고 행진하게 했다. 포로들의 혀를 잡아 뺐고, 밧줄로 그들의 몸을 잡아 당겨 산채로 가죽을 벗겨 성벽에 전시했다’(p. 21). 요나보다 조금 앞서 살았던 아합과 예후는 무리한 조공을 바쳐서라도 간신히 연명했다. 하지만 결국은 요나의 조국은 이들의 칼날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런 원수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그들이 살아남게 하라고?
이제는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명령한 곳의 반대편으로 떠나는 배를 탄 것을 방탕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악한 놈들이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 하나님의 마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을 닮았기에 인간은 소중하다. 또한 하나님을 닮았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청종하고 그 분을 최상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한다. 요나 선지자는 어떠했을까?
그는 방탕한 자다. 하나님을 최상으로 섬겨야 할 종이건만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었다. 자신의 조국이다. 어쩌면 요나 자신도 마음에 도사린 이 우상을 눈치 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향한 충성도 버리는 것을 그가 다시스 행 배 티켓을 구입했을 때에 알아보았다. 만약 그에게 조국(祖國)과 하나님,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했다면 그는 어쩌면 전자를 택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보다 이스라엘 사람이란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pp. 138-139).
하지만 하나님께는 달랐다. 모든 인생들이 다 당신의 형상을 닮은 자신의 피조물이었고 그래서 이들을 긍휼로 대하실 수밖에 없었다. ‘긍휼, 헤세드란 그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마음이 부서져 우는 것이다(p. 154).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창 6:6; 사 63:9). 인간은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서는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신의 특징을 ‘아파테이아’(apatheia: 부정어 a, 감정 열정을 뜻하는 pathos의 합성어), 즉 무정념(無情念)으로 설명했다. 신이란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마음의 요동이 있어서는 안될 존재이다(p. 154).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께는 인간의 고통이 당신의 아픔이었고, 그들이 죄로 멸망의 길에 들어설 때마다 괴로웠다. 이스라엘 때문에 슬펐고(호 11:8), 앗수르 때문에 괴로웠다. 하나님이신 독생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많이 아프셨다. 예수님이 웃으셨다(눅 10:21)고는 한 번이지만 우신 것은 스무 번이나 된다. 우리의 슬픔은 그분의 슬픔이었고, 우리의 고통이 그분에게 고통이었다(p. 162). 그분의 긍휼이 우리를 그분과 연결시켜 주었던 것이다. 요나가 이 마음을 알았더라면 악인들이 망하기를 바라지는 못했을 것이다. - 이웃 사랑을 말하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일까? 그분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이다. 사랑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분을 설명한다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신약 성경 기자들은 사랑 또는 애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가페’에 새롭고 독특한 의미를 부여했다. 존 스토트에 따르면, 성경에서 “아가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기 희생을 뜻한다.” 요한일서 3장 16-18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새번역).”
십자가 사건은 사랑의 정의를 썼다. “미움의 본질이 살인인 것처럼 …사랑의 본질은 자기희생이다. … 살인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고, 자기 희생은 자기 목숨을 내놓는 일이다(p. 194). 십자가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오셔서 우리를 대신한 사건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다”(고후 5:19). 예수님은 자신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고 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신다고 했다. 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성부께서 자신을 낮추어 그분의 독생자 안에서 독생자를 통해 우리를 위한 육신, 죄, 저주가 되셨으니 이는 그분의 성품을 손상시키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p. 201).
오래된 어느 이탈리아 교회에는 십자가 처형 그림이 걸려 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손발을 뻗은 그리스도의 뒤편에 ‘거대하고 어슴푸레한 모습’의 하나님이 있다. “예수님의 손을 꿰뚫는 못이 하나님의 손을 뚫고 들어간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하나님을 뚫고 들어간다.” 이 그림은 성경에 충실한 진리를 보여 준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피로’(행 20:28) 사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피다(p. 201).
멸망이 예정된 니느웨나 풍랑을 만나 파선 위에 놓인 선원들에게 보여준 요나의 행동은 선한 사마리아 인의 모습(눅 10:25-37)과는 큰 차이가 있다. 사마리아인은 위험한 장소를 지나다가 강도의 습격을 받아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상처를 입은 채 길가에 버려져 죽어가던 한 유대인을 만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원수간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인은 그 유대인을 구해 주었다. 강도 떼는 언제든 출몰할 수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지나가야만 하겠지만 사마리아 인은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으며 주막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부탁한다. 게다가 그 일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자비로 계산하였다(p. 207).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를 질문하시면서 원수를 돕는 사마리아 인처럼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민족, 종교, 가치관, 문화를 초월하여 신체적, 물질적, 경제적 필요를 채워 주는 이가 진정한 이웃이라고 정의하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에서 희미하게나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 그 분의 거룩함은 죄로 물든 우리를 거부 하셔야 마땅하다. 인류가 자신을 죽일 것도 아셨다. 하지만 그 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이,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거침으로써 우리도 할 만한 수준의 희생과 드림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이 보이는 듯 하다.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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