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었다. 정신도 못 차리는 사이에 성탄절이 지나갔다. 오늘 소개할 팀 켈러의 소책자인 [예수 예수]는 성탄절 전에 읽었어야 했다. 이 책은 절기를 맞아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때에 맞게 소개해야 되겠지만 연말까지 기다리기에는 감당하기 힘든 벌이 될 것이다.
책의 초두에서 이 시대의 잘못된 두 가지 흐름을 소개한다. 먼저 뉴욕 타임즈에 실린 한 광고 카피이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것과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연합시키고 나아가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구를 접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주위에서 흔히 듣고 보았을 법한 내용일 것이다. 광고대로라면 빛은 우리 안에 있고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주체도 인간이다. 빈곤과 불의, 폭력과 악은 우리가 거뜬히 정복할 수 있다. 또 만약 힘만 합할 수 있다면 ‘세상의 연합과 평화’까지도 창출할 수 있다. 너무도 듣기 좋은 자력 구원의 종교이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20세기 후반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체코 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모두를 깊이 들여다보았고 어느 쪽도 그 자체만으로는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없을 것이라 내다 보았다. 현대 과학 문명 역시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다. 예로서 우리는 세계 1, 2차 대전을 통해 윤리적 토대가 없는 과학이 빚어낸 유례가 없는 대량 학살을 보았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전쟁 위협, 인종간의 폭력, 환경 파괴를 이 시대의 그 어떤 것으로도 구해낼 수 없다. 하벨은 인류가 추구하는 행복은 인간 자신들의 힘과 애씀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구원의 신의 영역인 것이다. 그는 인간의 고질적인 질병이 “자신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늘 망각하는 것”이라 보았다. 이어서 말하기를 “정치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곧 자기 힘과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세상의 어둠을 더 악화시켜왔다”(p. 24-25)고 지적했다.
이번에는 버틀란드 러셀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기독교를 얼마나 비판했고 공격했다는 것은 익히 잘 알 것이다.
과학이 제시하는 세상 곧 우리가 믿어야 할 세상은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다. … 인간은 원인들의 산물인데 그 원인들은 자신이 이루려는 목표를 예견한 바 없다. 인간의 기원과 성장과 희망과 두려움과 사랑과 신념은 다 원자들이 우연히 배열된 소산일 뿐이다. 그 어떤 열정과 용맹한 행위와 심오한 사상과 감정도 개인의 삶을 무덤 너머에까지 지속시킬 수 없다. 인류 역사상의 모든 수고 모든 헌신 모든 영감 모든 총명하고 비범한 재능은 태양계의 총체적 사멸과 함께 소멸될 운명이다. 인류의 위엄이라는 신전도 우주의 황폐한 잔해 속에 송두리쨰 파묻힐 수밖에 없다. … 요컨데 이런 진리를 발판으로 삼아 불굴의 절망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만 영혼의 거처를 안전하게 지을 수 있다(버틀란트 러셀, “A Free Man’s Worship”)
웅장한 단어들의 나열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들에게는, 간신히 잊고 살았던 삶의 절망감을 다시 헤집어내서 몸서리 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면 그의 말은 재기 넘치는 말장난 정도로 느껴질 것이다.
성육신 교리를 가장 힘들게 감당했을 이들은 다름아닌 예수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 냈어야 했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의 신관은 특이해서 인간이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개념에 대해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이었다. 동양 종교들이 믿는 신들은 만물에 두루 깃든 비인격적인 힘 정도이다. 위대한 사람들을 신의 현현이라 해도 전혀 거부감이 없다. 그 무렵 서양 종교 역시 그러했다. 신들이란 인간보다 조금 나은 부류에 지나지 않았다. 신들은 인간으로 변장하고 인간계에 나타나 서로 겨루었고, 심지어 사랑스런 여인을 만나면 연정을 이기지 못하고 씨를 뿌리는 못된 짓거리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최고 신이라 불리는 제우스가 인간 세계에 뿌린 정욕의 씨를 찾아내서 전설로 미화시키는 일에 너무도 익숙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달랐다. 그들의 하나님은 인격을 갖춘 신이요 무한하신 분이다. 그분은 우주 속에 깃든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존재하게 하신 근원이며, 우주를 무한히 초월해 계신 절대적 두려움의 존재였다. 신의 이름 여호와는 입에 담을 수도, 함부로 쓸 수도 없었다. 야훼를 말할 때는 하셈(그 이름)이라 했고, 써야만 할 때는 지금까지 사용하던 펜을 놓고 새로운 펜으로 그 이름을 그렸다. 이러한 그들에게 인간이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상상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는 처형 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추종자들에게 말과 가르침, 행위들, 삶 전체를 통해 자신이 신에게 나아가는 안내자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 주장했다(p. 73-74).
우리는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듣고 그를 향해 보여주었던 상반된 반응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분께 심히 격노했고 죽이고 싶을 정도의 적대적인 감정을 가졌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스스로를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라고 주장하자 낭떠러지로 끌고 가 떠밀어 죽이려 헸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자들 지도자들 역시 그러했다. 율법을 아는 그들이 율법을 어겨가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 목수의 아들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을 참칭했으니 신을 모독한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 향한 미움이 극에 달했고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불법자를 죽여야만 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환영한 무리들도 있었다. 가버나훔에 파견되어 왔던 로마의 백부장이 그러했다. 그는 적어도 50줄의 나이에 들어섰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청년 예수님 앞에 나타나 자신을 예수님의 부하로 낮춘다(마 8:8-9). 어떤 이는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무릎을 꿇고 경배함으로서 신에 버금가는 예배 행위를 했다. 그들은 인간 예수님에게서 인간이 아닌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위에 언급한 두 부류 중의 어느 한쪽일 것이다. 그 분의 자기 주장을 옳다고 믿는다면 모든 삶의 중심을 그분께 둘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분은 혐오의 대상이요 기피해야 할 대상이다. 그 외의 다른 태도란 있을 수가 없다. 그분은 하나님이거나 모자란 인간이다. 그 분은 무한히 오묘한 분이거나 완전히 미친 사람이다. 그런데 주위에 믿는다고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이들이 많은 것은 어찜일까? 삶이 믿지 않았던 이전과 다름이 없다. 영혼의 위기도, 지속적인 삶의 변화도 없다. 왜 그럴까? 서운하게 들을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주장과 반대로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p. 78-79).
그 분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이것이야 말로 인생 최고의 기쁨이 될 것이다. 세상이 존재의 전부가 아니며 죽음 후에도 삶과 사랑이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는 이 세상의 악과 고난은 끝이 날 것이다. 이렇게 문제 많은 세상도 여전히 소망이 있고 끝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분으로 인해 우리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게 된다(p. 79).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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