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주로 영혼 구원과 개인의 경건 생활에 집중할 것을 가르쳐 왔다.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무리들은 전통적 복음진리에서 탈선하여 사회 구원에 집착하는 인물로 간주했고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 같은 오해의 소지가 영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의 일부는 ‘대속이나 칭의를 강조하는 것을 편협한 개인주의로 폄하했고 교회는 신학적인 강조점을 사회정의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p. 18). 일례로 ‘월터 라우센부쉬’이다. 그는 침례교 목회자로 뉴욕의 빈민가에서 사역했다. 그는 그곳 사람들의 끔찍한 가난과 인종차별, 열악한 환경들이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교회는 이런 잘못들을 변혁시켜야 한다고 믿었고 결국은 목회 방법론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속의 관점에서 떠나 ‘이웃 사랑의 전형’으로 주장했다(p. 16). 하지만 팀 켈러는 사회정의는 성경의 근본 가르침이요 복음에 따르는 필연적인 반응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신성하며 존엄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극악무도한 범죄로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는 범죄인 것이다. C. S. Lewis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이렇게 설명한다.
‘평범한’ 인간이란 없다. 여태 대화를 나누었던 이들 가운데 그렇고 그런 범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국가니, 문화니, 예술이니, 문명이니 하는 것들은 유한하며 인간에 비하면 그 생명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하루살이 목숨에 불과하다(위의 책에서 재인용. p. 134. 원책은 The Weight of Glory and Other Address, p. 46.).
이제 구약과 신약에서 말씀하는 정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미가 선지자
(미 6:8, 개정)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인자는 하나님의 무차별적인 은혜와 동정을 의미한다. 공의는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다(잠 31:9). 또한 약자들이 공동체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뜻하기도 한다. 기업이 없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에게 백성들은 지정된 몫을 드려야 했고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봐야 했다(슥 7:9-10; 시 68:5; 146:7-9). 이는 한 사회의 공의를 평가하는 척도이다.
이런 개념은 고대 세계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신들은 왕이나 제사장, 위대한 장수들 같은 당대의 최고 인물들을 통해서 능력을 행사했다. 그런 존재를 번역한다는 것은 신을 거역하는 것이었다. 그같은 세상에서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는 것은 파격 자체였다(p. 38). - 정의를 지향하는 공동체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안에는 가난한 자가 있을 수 없다’(신 15:4-5). 그런데 불과 몇 절 뒤에 상반된 말씀을 본다.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펴라”(신 15:11). 율법대로 산다면 가난한 자는 나올 수 없다. 빈자를 해방시키는 율법의 가르침들을 ‘쉐미타’(shemitta: 해방)라 부른다. 아래를 주목하라.
7년마다 모든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신 15:1-2). 채권자는 빚 독촉을 할 수 없으며 담보물도 돌려줘야 한다. 당시 담보물이라면 토지였다. 이것을 돌려 받지 못하면 그는 여전히 종아닌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돌려받은 자는 새 출발의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 게다가 구제는 가난한 자의 부족함이 채워져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 한다(신 15:7-8) (p. 62).
다른 하나는 이삭줍기이다. 곡물을 추수할 때 땅 네 귀퉁이의 곡식들을 남겨 두어 가난한 자들이 추수할 수 있게 했다(레 19:9-10; 23:22). 가진 자의 수익 회수는 제한하여 가난한 자들이 직접 노동을 통해서 생계 대책을 마련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일방적인 수혜와는 다른 것이다. 또한 가진 자의 소유를 함부로 탈취할 수 없게도 규정함으로서(신 23:24-25) 부자를 악의 축, 가난한 자를 그 반대로 여기는 어떤 편견도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십일조 규정도 이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연 소득의 10%는 레위인과 제사장에게 바쳐서 제사 제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3년에 한 번씩 공공 창고에 또 다른 십일조를 모아 성중의 고아와 과부들에게 제공했다(신 14:29).
마지막으로 희년 제도이다. 매 7년째는 채무가 탕감되고 노예들은 해방되는 것을 안식년이라고 한다(신 15:1-18). 그런데 안식년이 일곱 번(즉 49년)이 지난 다음 해, 즉 50년째 되는 해는 희년이다. 빚을 탕감과 더불어 부의 원천인 토지가 가나안 정착 당시의 족속과 가족에게 환원되었다. 적어도 50년만에 한 번은 쏠렸던 부가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레 25:8-55). 개인적으로 치면 50년 이상만 산다면 누구든지 일생에 한 번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p. 64). 그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 현실인 셈이다. - 예수님의 공동체: 초대 교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자신도 강도를 만날 수 있는 위험을 무릎 쓰고 라도 연약한 자들의 삶에 헌신적으로 개입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 교회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자들의 신앙공동체이다. 다시 말해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은 신정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구약의 공의와 자비의 정신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실천에 옮겼음을 본다. 그들은 ‘교제’로 해석된 나눔의 삶을 실천했다. 있는 자들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나누었고 그 결과 교회 안에 가난한 자가 없었고(행 2:34-37, 41, 44-45) 집사들을 세워 과부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과 생필품을 분배했다(행 6:1-7; 딤전 5:3-16). 바울 역시 같은 선상에서 사역했다. 에베소 교회를 떠날 때 ‘열심히 일해서 가난한 자를 도울 것’을 당부한다(행 20:35). 또한 마게도니아 교회 성도들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연보에 참여해 준 고린도 교회에 감사하면서 율법을 인용한다(고후 8:18; 출 16:18)(p. 120-122). - 민권운동(Human Right Movement)
인종 차별이 범죄행위인 것은 누구나 수긍하는 진리다. 하지만 마틴 루터 킹의 인권 운동이 있기 전까지 인간의 가치는 피부색에 따라 달리 매겨졌다.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이었다. 부패한 인간의 심성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야만인이란 딱지를 붙이고 싶어하는 기질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인간은 자유인으로 태어나는가 하면 다른 무리는 태생적으로 노예이다. 후자에게는 노예 생활이 편안한 동시에 정당하다”라고 했다(p. 158). 마틴 루터 킹은 어떻게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와 존엄을 지닌다고 할 수 있었을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의 American Dream 설교의 일부를 인용한다.
우리나라의 토대를 놓은 선조들은 진실로 성경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라틴어 ‘이마고데이(imago Dei)’의 기본 개념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주입해 주신 성질이 있다는 관념입니다. 하나님과 상당히 많은 공통점이 생긴다는 게 아니라 주님과 교제할 능력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능력이 인간을 독특하게 합니다. 인간을 가치 있게 합니다. 인간을 존엄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색깔의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높은 소리를 내는 흰 건반부터 낮은 소리를 내는 검은 건반까지, 그분의 키보드에서는 모두 중요합니다. 인간은 하나같이 주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형제처럼 어울려 지내고 저마다 지닌 위엄과 가치를 존중하며 살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p. 169에서 재인용).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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