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판사였던 이반 일리치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기 직전 침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에 빠진 그를 보며, 가족들은 자신들의 인생에만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 아내는 딸의 결혼만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이반은 외롭게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죽음을 저항해 보지만, 죽음을 인정하지 않지만,
죽음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옵니다.
70년 동안 살아온 다윗은 그의 인생을 시 39:5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로 정하셨으니, 나의 일생은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소이다. 사람은 안정적일 때에도 진실로 모두 허사뿐이니이다.”
한 뼘 길이 같은 인생이 ‘없는 것 같다’(히 : אַ֫יִן))는 것은, 지나가서 찾을 수 없고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쏜 화살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인생을 ‘허사’(히 : הֶ֫בֶל))라고 하는 것은 숨결 같고, 텅 비었고, 공허한 것을 의미합니다.
한반도를 반백 년 넘게 눈물을 흘리게 한 김일성도, 마치 숨결처럼 사라졌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모택동도 마찬가지로 사라졌으며, 세계 음악계의 신으로 불리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앨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역시 이제는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바벨로니아 제국, 앗시리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제국도 모두 역사 속으로 감춰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농구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Kobe Bryant)와 한국 야구 선수 최동원 선수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절망이 아닌 소망으로 역전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은 결국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로 나아가는 것이며, 부활의 은혜는 그날에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사망과 애통이 없는 새로운 삶을 선사해주실 것입니다. 그날에는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이번 부활절(Easter)에는 죽음을 이긴 승리의 예수님을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ANC-SA 온누리교회 부목사 손대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