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에 “고맙네”라는 별명을 가진 할아버지 한 분이 같은 동네에 홀로 살고 있었다.
그분은 무슨 일이든지 말끝마다 허리를 굽혀 “고맙네, 고맙네” 라고 하였다.
하루는 고기가 잡숫고 싶었던지 돼지고기 반근을 푸줏간에서 사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넘어지면서 신문지에 싼 고깃덩어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온 동네를 쓸고 다니던 노랭이 똥개가 자나가다가 할아버지 고깃덩어리를 물고 출행랑을 치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넘어진채 허무한 눈으로 물끄러미 똥개를 원망스럽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고맙네, 고맙네”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때마침 지나가던 동네 젊은이가 놀리듯이 말했다.
“고깃덩어리는 잃어버렸는데 할아버지 뭐가 그리 고마워요?”
이때 할아버지 하는 말이 “아,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지만 내 입맛은 아직 살아 있으니 고맙잖나?”고 했다.
그분은 이북에서 홀로 피난을 와서 외롭게 살면서 아마도 이미 인생의 이치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참된 감사란 감사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감사할 수 있는 감사가 아닐까…
성숙한 신앙이란 감사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다.
구약성경에서 감사라는 말을 “야다”라고 하는데 “마음의 샘물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감사하는 마음은 마음속에서 샘물의 줄기가 흐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산속에서 솟아오르는 생수의 원천이 흘러 내려가면 온 동네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해 준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한 없는 축복(祝福)이고 감사(感謝)의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영어로 성찬(聖餐)을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성찬 때에 축사(祝謝)하셨다는 단어에서 왔다.
축사(祝謝)는 축복(祝福)과 감사(感謝)의 약자로 헬러어로의 “ευχαριστεω”(유카리스테오)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성만찬은 예수님의 피의 잔을 마시고 찢기고 상한 몸을 상징하는 떡을 뗌으로 한없는 축복(祝福)과 감사(感謝)가 아닐 수 없다.
감사라는 단어의 근원도 영어의 “Think, Thanks”라는 말과 같이 모든 일을 깊이 생각하면 결국 감사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Thanksgiving”이라는 말은 “모든 축복을 깊이 생각하고 감사를 표현해 드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다.
그런데 이토록 감사의 샘물줄기가 흐르는 사람이 있고 마음의 샘물줄기가 메마른 사람들이 있다.
Alaska의 Fairbanks에서 한 시간을 운전을 하고 산속으로 들어가면 작은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는 매우 흥미롭고 신기한 온천이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끓는 뜨거운 온천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바로 그 옆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른다.
그러니까 온천 아래 개천에서 그 동네 사람들이 빨래 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온천물에서 빨래를 하고 냉천에서 행구기만 하면서 깨끗하게 빨래를 해 가는 편리한 곳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관광객이 안내하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 부인들은 참 좋겠습니다.“
“왜요?”
“찬물과 더운 물이 펑펑 나와서 마음대로 빨래를 할 수 있으니까요.”
안내자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천만에요!”라고 대답했다.
“아니, 왜요?”
“이곳 아낙네들은 감사하기보다는 항상 불평이 더 많답니다.”
“아니, 왜요?”
“더운 물과 찬물이 땅에서 나오는 건 좋은데 빨래하는데 꼭 필요한 비눗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이 더 많답니다.”
불평하는 마음이 지배하면 아무리 좋은 것을 손에 쥐어줘도 불평하게 마련이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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