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칼럼 (송영일 목사) –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 (3)
우리는 지난 2회에 걸쳐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과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가? 어느 곳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어느 곳에서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앎으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이 말씀을 보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라고 한다. 분명하게 “율법의 행위로써 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수 없이 많은 성경의 말씀이 이를 강조한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특히 야고보서에서 이를 강조한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 만은 아니라.”(약2:24)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2:20)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특별한 평가를 하신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11번이나 반복한다. 그 중에서 한 가지 가장 놀라운 말씀을 살펴보려고 한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믿음의 눈으로 보았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제물이 되실 구원자를 바라보고 기다리며 기뻐하였다. 모리아 산의 제단에서 독자 이삭을 죽음에서 살리신 여호와 이레의 손길을 통해, 장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고 기다리며 즐거워하였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독생자를 알게 되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독생자가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죽으실 것을 보았을까? 제물이 되신 독생자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어떻게 믿었을까? 예수님 오시기 2천년 전에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 성경에서 그 해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갈3:8). 복음의 핵심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롬
1: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다. 이 복음을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전하셨다(갈3:8).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해주셨을까? 바로 창세기 22장에 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네, 주여 여기 있나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아브라함은 너무 놀랬지만 순종했다. 아들 이삭은 장작을 짊어지고 갔다. 아브라함은 칼과 불을 들고 갔다. 어떻게 얻은 자식인데 저 자식을 제물로 드려야 하다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걸어서 하루 길을 무려 3일 동안 걸어서 갔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모리아산 꼭대기 제단을 멀리서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때 갑자기 독자 이삭이 아버지를 불렀다.
“내 아버지여!”
“내 아들아 애비가 여기 있다.”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어린양을 어디에 있어요?”(창22:7)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찢어졌을 것이다. 자기가 번제물인데 하나님께 드릴 어린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아들을 보니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그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믿음의 대답을 해 준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히브리 11:17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믿음으로 드렸다”고 말한다. 무얼 믿었을까? 히브리서 11:19에서는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은지라.”고 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없는 것 가운데서 받은 이삭을 드릴지라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부활을 믿었다. 그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높이 들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급히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고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22:11-1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대신하여 정말로 제단 옆 칡넝쿨에 뿔이 감겨 있는 어린 수양을 준비해 두셨다. 이삭을 대신하여 여호와 이레의 수양을 제물로 드렸다. 바로 이 순간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날이었다. 독생자라도 아끼지 아니함으로 믿음을 행함으로 옮기는 믿음을 보셨다. 그래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법칙은 변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과 행함은 기차길과 같다. 구원이라는 기차는 믿음과 행함의 두 기차길 위에서 천국을 향하여 달려 갈 수 있다.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면 구원이라는 기차는 전복될 것이다. 이를 수학으로 표기하면 “믿음”+”행함”=”온전한 믿음”이다. 믿음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반드시 행함이라는 삶이 있어야 한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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