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아브라함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혈통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의 후손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아셨다.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담 이후에 그 어떤 사람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사람은 없다. 그래서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하실 계획을 이미 세우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질문에 반드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어느때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고 어느때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에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자 이렇게 대꾸한다.
“자식은 무슨 자식이요,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에서 얻은 엘리에셀입니다.”(창15:2)
엘리에셀(도우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다메섹에서 얻은 충성스러운 종이었다. 그는 나중에 나이 들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고 사라의 고향으로 파송을 받는데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데리고 온 장면이 있다.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주인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엘리에셀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당시 나이든 노종(老從)으서 주인 아브라함의 일에 과연 매우 충성스러운 종이었다(창24). 그래서 무자(無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엘리에셀을 양자(養子)로 삼겠다고 대답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No!”고 말씀하신다.
“그는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15:4)
그 후 세월은 흘러 갔다. 나이는 들어가고 점점 기력은 쇠해져 가는데 주신다는 아들의 소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신 지 10여 년이 지난 후 아브라함의 85세 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합리적인 변칙(變則)을 사용했다. 신앙의 합리화(合理化)는 경계해야 할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매우 위선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합리화(合理化)는 신앙인들에게 자주 나타난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마찬가지였다. 사라 자신은 경수가 끊겨 애기를 가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사라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하였다. 거기서 낳은 아들이 현재 중동국가의 조상 이스마엘이다. 당시 문화적으로 종이 주인의 자식을 낳으면 합법적으로 주인의 자식이 되었다. 변칙이란 이와 같이 변칙을 원칙으로 합리화한다. 그 변칙의 신앙 때문에 4천년여 동안 이삭의 후손들과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싸우고 있다.
어느덧 이스마엘의 나이 열세살이 되었다(창17:25). 아브라함 99세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옛날 언약한대로 사라에게 아들을 주리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뭐라고 대답했는가?
“이제 제 나이 100살이 다 되었고 사라 나이 90세인데 무슨 아들은 아들이요… 이스마엘이나
아들로 삼겠습니다.”(창17:18)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No!” 라고 대답하신다.
“아니라, 명년 이맘때 사라가 친아들을 낳을 것이니라.”(창17:21)
결국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키셨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사라의 나이 90세) 때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했다. 그리고 변칙으로 얻은 이스마엘을 쫓아 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합리화를 이처럼 단호하게 거부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에(사라 90세) 아들을 낳게 하셨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먼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시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 능력이시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신 능력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하실 수 있다.
두번째 질문은 왜 그토록 긴 세월을 기다리게 하셨을까? 기다림은 인내가 필요하다. 약속하신 것을 얻으려면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인내에는 반드시 소망이 필요하다. 소망이 없이는 아무도 인내할 수 없다. 오늘은 좀 힘이 들어도 내일은 더 좋아지리라는 소망 때문에 오늘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 우리에게 꿈이 있고 소망이 있으면 오늘의 고통을 참고 이길 수 있다. 소망에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 성경에 보면 믿음과 소망은 항상 같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고전13:13). 소망은 믿음과 함께 살아있다. 장래에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는 소망,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나를 얼싸안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씌워 주실 소망, 다시는 눈물도 아픔도 고통도 죽음이 없는 영원한 천국의 소망이 있다. 믿음이라는 받침대가 소망을 지탱해 준다. 믿음의 받침대가 없으면 소망이라는 지게는 좌절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소망이 끊기면 자살을 하게 된다.
왜 그토록 기다리게 하셨을까?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 무(無)에서 (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너무 기뻤다(창17:17) 25년을 참고 기다렸다. 아들을 가질 수 있다는 소망으로 즐거워했다. 약속을 지켜 주시리라는 믿음이 소망을 지탱시켜 주었다. 결국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100세 때에 약속하신 독생자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이를 증거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갈3:6)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4: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약2:23)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계속)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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