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삼석 시인이 쓴 매우 짦은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엄마의 등에 입힌 아이와 엄마의 짧은 대화이다.
엄만, 내가 왜 좋아?
그냥….
넌 왜, 엄마가 좋아?
그냥….
이 짧은 시를 읽을 때 가슴이 찡하니 아려 왔다. “그냥”은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다 표현할 수 없어서 “그냥”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냥” 좋은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극치와 절대적 신뢰의 한 표현이다. 엄마는 아가를 품속에 안고서도 “아가야, 아가야..” 아가만 부른다. 내 품에 안긴 “아가야”가 그냥 사랑스럽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을까? 왜 하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을까? 대답은 “이유 없음” “조건 없음”이 아닐까? 진실한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가 없다.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내 자식이기 때문이다. 내 몸으로 피 흘려 낳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무슨 조건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십자가에서 피 흘려 값 주고 낳은 내 자식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이유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였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라고 부른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일들을 다 기록하고 난 후에, 마지막 한 마디는 “그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노라고, 이 세상이라도 이 사랑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15)고 끝을 맺는다. 공동번역은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일들은 오늘도 계속 행하신다. 어찌 그 뿐이겠는가?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성령강림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전파를 어떻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이 지상에서 일어난 복음전도의 일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다. 성령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을 만일 다 기록한다면 이 땅에 둘 곳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계시된 복음은 너무나도 심원(深遠)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다 둘 수는 없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네.”
생각해 보자.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임마누엘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시공을 초월하여 이 땅위에서 행하신 일이 어찌 고작 4복음서에 기록된 것 뿐이겠는가? 비천한 갈릴리의 어부에 불과했던 사도 요한 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만도, 요한은 요한복음보다 훨씬 더 긴 책을 쓸 수 있었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지난 2천년 동안 이 땅을 거쳐간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와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 한사람 한사람의 삶이 다 한결같이 책 한권 분량 이상의 은혜로 가능할 수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요한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행하신 행적과 베푸신 은혜를 모두 기록할 경우 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책을 수용하기에 부족할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은혜는 너무나 크고 엄청나서 주님 안에 거하는 한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 다윗이 무엇이라 노래했는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자에게 무슨 부족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은혜를 모두 기록한다면 세상이 부족할 것이라는 요한의 고백과,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노래는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복음 안에서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만 넘치는 은혜의 삶을 펼쳐 갈 수 있다. 주님의 부족함이 없는 은혜, 이것이 사도행전의 문을 여는 열쇠요, 그 막을 올리는 동력이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던 갈릴리의 어부들이 어떻게 사도행전의 증인들이 될 수 있었겠는가? 복음 안에서 얻은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였다. 그 선택받은 소수의 증인들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졌다. 사도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주님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할 수 없었다.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그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이 땅 위에 친히 펼치신 주님의 역사 “성령행전”이다. 지금도 “성령행전 29장”은 끝나지 않았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newlife0688@gmail.com
(832)205-5578
www.houstonnewlif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