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스스로 버리노라”, “스스로 비우노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이다.
스스로 비우는 것이다.
자원해서 비우는 것이다.
자기 비움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고 피동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자발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비하의 자리이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곧 비천한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것 자체가 낮아짐이며 자기비하이다. “게노메 노스”(혹은 에게노 토), 비하의 출생이라는 말이다.
성육신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본체”(모르페)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품’을 말한다.
본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는 인간으로 오시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셨다.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시고 본질적으로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자신의 권리나 특권을 포기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뜻이다(막 10:45;눅 22:27).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호모이오마티)는 “유사함”(similarity)이나 “동일함”(identity)을 강조하는 단어로 그리스도께서 죄의 본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워서 또 다른 존재가 되셨다.
그저 죄인에게는 죄인의 모습이 되셨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기비하로부터 시작하셨다.
그리고 십자가까지 낮아지시고 무덤에까지 낮아지셨다.
예수님의 인생은 완전한 자기 비하였다.
자기비하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해 본 일이 있는가?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없어지고 만다.
남편 앞에 자기고집만 부리는 사람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내 앞에 자기주장만 내세운 사람은 아내를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아직도 나라는 존재가 강하게 작용하고, 내 자존심이 아직도 그렇게 소중하다면 그건 사랑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 자존심이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동안 다 녹아 없어지고 만다.
명예도 권력도 철학도 내 주장도 내 욕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눈 녹듯이 사라져 녹아 없어지고 만다.
그것이 겸손이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건 절대로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사랑 그 자체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사랑 앞에서는 유능하지만은 무능해지고 만다.
수십년 전에 오사카에서 유학을 할 때 일본의 어느 화가가 그린 예수님의 초상을 본 적이 있다.
그 그림의 제목이 “바보 예수”였다.
예수님은 아무리 보아도 바보처럼 보였다.
그 그림을 보면 예수님은 “너와 나”를 너무 사랑하고 고생을 많이 해서 입술이 타고 마르고, 불쌍한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이 갈비뼈가 앙상하게 보였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너무 불쌍히 여겨서 한 쪽 눈이 찌그러지고 진물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그렸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확실히 바보가 되셨다.
그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되어야 하셨을까?
우리를 사랑하셔서 바보가 되셨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무죄하시 분이 남의 죄악을 뒤집어 쓰고 죄값을 치러주는 바보가 되셨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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