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처럼 변하기 어려운 존재는 없는 것 같다. 주먹으로 때린다고 해서 사람이 말을 듣는 게 아니다. 야단을 친다고 변하지 않는다. 온갖 좋은 말로 훈계를 한다고 해서 깨닫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선한 말로 아무리 가르쳐도 듣지 않는다. 듣는다 해도 잠시뿐이다.
그러나 사랑하면 사람이 변한다. 사랑하면 돌 같은 마음이 무너진다. 사랑은 등을 돌리지 않는다.
사랑은 배신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무너지고 변화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그 사랑이 아니면 아무도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희생을 동반한다. 희생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 보았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내 자신 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내 가진 모든 것들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이다. 그럴때 가족은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고 이웃과 하나될 수 있다.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막8:36)
온 천하와 제 목숨을 비교하셨다. 무슨 말인가? 하나밖에 없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뜻이다. 내 목숨이 사라지면 온 천하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내 목숨은 온 천하보다 귀하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내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던 것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서 하늘의 보좌를 지키는 것보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그분에게는 더 귀중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바쳐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라 하셨기에 묵묵히 내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순종은 가장 좋은 사랑의 행위이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수제자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그 무엇보다 나를 더 사랑(Agape)하느냐?”(요21:15)
그런데 베드로라 하지 않고 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을까?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시키려는 것이었다. 3년반 전에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였다. 동생 안드레가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1:42)
“시몬”이란 쉬운말로 표현하자면 “굴러다니는 짱돌”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베드로는 본명처럼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람어로 “게바” (Cephas)라는 새이름을 주셨다. “게바”는 헬라어로 베드로(Petros)로서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반석”이라는 뜻이다. 그가 지금은 비록 굴러다니는 짱돌 같을 지라도 수제자(首弟子)로서의 큰 믿음의 자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반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함으로써 “반석”이 아니라 아직도 “짱돌”이었다. 그 후에도 베드로는 급한 성미 때문에 수시로 실수를 저질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다.
그렇다. 사람은 타고난 기질과 성품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으면 많은 연단을 받아야 한다. 연단은 긴 고난의 시간들이다. 내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고난과 연단의 시간은 그만큼 길어질 뿐이다. 그런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나에게는 버리지 못한 한가지 때문에 아직 고통을 당하고 있는 건 없는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훈련을 받은 지 3년반이 지나도 아직도 “굴러다니는 짱돌”에 불과하구나! 라는 의미로 부르셨다. 그런 베드로를 아셨기에 애초에 새이름을 주실 때 “장차(먼 훗날)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는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도록 하심으로 그에게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 한 것이다. 용서란 무엇인가? 새로운 기회를 주는(받는) 것이다. 회개란 무엇인가? 잘못을 알고 새로운 기회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용서도 회개도 결국 예수님의 시랑에 근거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면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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