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에 도서관에서 프랑스의 작가 삐에르땅 빠셍이 쓴 단편 중에 “우리의 삶의 날들”이란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다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중에 이런 내용이 생각난다.
프랑스의 보그 마을에 마음씨 착한 곱추소년 “우그린”은 누나 “소랑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이 갓난 아기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어머니는 무능력한 알코올 중독자로 변했다. 그래서 누나 소랑케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고 곱추 동생을 키웠다. 불행하게도 누나 소랑케는 어느 집안일을 돌보다가 뜻밖에도 도둑의 누명을 쓴 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뒤로 소랑케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맹세코 결백했지만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는 언니의 유혹으로 소랑케는 몸을 팔아 곱추 동생 우그린을 부양하여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곱추 우그린이 마을로 나갔는데 마침 그 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우그린을 밀어 넘어뜨리고 쓰러진 우그린을 발로 차고 밟으면서 창녀의 동생이라 놀려댔다.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말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을 교회에 함께 출석하던 교인들이었다. 바로 그 순간 그 곳을 지나가던 그 마을 교회의 성직자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무리들에게 호통을 치며 피투성이가 된 우그린을 구출해 내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말할 수없이 큰 충격을 받았던 곱추 우그린은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해 버렸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누나 소랑케는 권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소랑케와 우그린 남매의 자살 소식을 접한 교회의 성직자는 주일설교를 통해 “이 두 남매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인간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라”며 가슴을 치면서 탄식했다. 마침내 장례식 날이 되었다. 우그린 남매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마을 사람들 역시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모두 장례식이 거행되는 마을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장례식집례를 하는 성직자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설교를 했다.
“기독교인들이여, 이 세상 마지막 심판 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나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신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고 또 물으신다면, 그때 나는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저들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
착하디 착한 곱추 우그린과 마음씨 고운 누나 소랑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마을 사람들이 신부님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의 양떼들로는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리떼로 보였다. 그 이리떼들과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살아야 하는 그 성직자의 절망감과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지 그의 설교를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만약 보그 마을의 이 성직자가 오늘 이 땅에 와서 우리의 삶을 안팎으로 속속들이 살펴본다면 과연 무엇이라 말할까? 이 세상 마지막 심판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내 양떼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주님, 주님의 양떼들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휴스턴이라는 도시에 함께 이민을 와서 살아가는 동족들이다. 교회는 달라도 모두 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아니 한 교회에 다니며 한 자리에 앉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교우들이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 양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주님, 주님의 양떼들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주님이시여! 저들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할까?
사순절 기간이다. 교회마다 똑 같이 예수님의 고난의 장면들에 대한 말씀을 나눈다.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며 채찍질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을 사람들은 과연 내가 당하는 고통으로 받아들일까? 아니 나 때문에 나를 대신하여 당하신 고난으로 받아들일까? 예수님이 맞으신 채찍질은 낚시바늘 같은 갈고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채찍질이었다. 채찍을 내리칠 때마다 살점에 박혀 살점이 찢기는 극한 고통을 주는 아픔이었다. 그것을 서른 아홉대를 맞으시며 신음하셨다.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때리고 발길질로 차고 가시관을 씌우고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온갖 악한 치욕을 다 당하셨다. 그것도 부족하여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혀 여섯 시간 동안을 처절하게 신음하시다가 운명하셨다. 누구 때문이었는가? 나 때문이 아닌가? 아니라면 아직 당신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일게다. 혹시 우리는 예수님께 채찍질했던 똑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아니면 목자이신 예수님을 순전히 따라가는 그분의 양떼들인가? 만일 예수님께서 나에게 “나의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예, 주님 저는 주님의 양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아니면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는 주님의 양떼처럼 보이다가 교회문을 나서면 다시금 이리떼로 변하지는 않는가?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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