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에 치더라.”(마27:29-30)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자 하나님의 무릎을 꿇렸다.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셨다. 갈대로 머리를 두들겨 맞으셨다. 만물의 창조주께서 온갖 조롱을 당하셨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다. 왜 그런 모욕과 멸시천대를 받으셨을까? 누구 때문에 그런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셨는가?
나, 나 때문이라고, “나를 대신하셨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의 수치가 나의 영광이 된다. 그래야 예수님의 멸시천대가 나의 존귀함이 된다. 그래야 예수님이 받은 저주가 나의 축복이 된다. 그래야 예수님이 받은 심판이 나의 무죄선언이 된다. 그래야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생명이 된다. 그래야 예수님이 음부에까지 내려가신 것은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었다.
본디오 빌라도는 채찍질 당하시고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신 비참한 모습을 하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 거리로 보여주면서 이렇게 외쳤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에케 호모 Ecce Homo)
채찍질 당하신 것도 모욕인데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만들어 극단적 모욕을 주었다. “여기를 보라, 채찍에 맞아 살점이 찢겨 나온 처철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가 거기 있다”고 할 때, 유대인들을 무어라 소리쳤는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무엇이 생각나야 할까? 채찍질 당하여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신 모습을 바라보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을 주느냐?” 그런 주님의 음성이 내 양심을 찔러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를 왜 그 참혹한 고난을 당하게 하셨을까?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대신 심판을 받으시려 함이었다. 그 분이 내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지 않았다면 나에게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 참혹한 고난을 통하여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고 영원한 부활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주님께서 고난을 통과하고 죽음을 통과하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다.
활활 타는 고난의 가마불을 지나지 않고 어찌 휼륭한 예술품이 나올 수 있겠는가? 쇠붙이가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연단되지 않고 어찌 강철이 될 수 있겠는가? 금광석이 고난의 풀무 불 속에서 녹지 않고 어찌 정금이 되겠는가? 누군가 혹시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지금이야 말로 간절히 더욱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이다. 누군가 지금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가? 지금이야 말로 내가 믿던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은혜의 순간이다. 혹시 아직도 고난 속에 있는가? 지금이야 말로 내 믿음이 정금같이 될 유일한 기회이다. 때때로 고난은 놀라운 하나님 사랑의 은총이다. 고난을 통과하면 반드시 찬란한 부활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고난의 십자가를 사랑한다. 예언자로 불리워졌던 미국의 시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칼힐 지브란(Kahlil Gibran)은 이렇게 기도했다.
“그대여, 당신은 아십니까?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그토록, 날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폭풍우가 휩쓸고 지날 때 어찌하여, 나는 더욱 강해지고, 참된 삶에 대한 확신은 더욱 커지는 것인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폭풍우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폭풍 후에는 잔잔한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기독교단 중에서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이 있다. 독일의 니콜라스 진젠도르프 (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은 신실한 신앙을 위하여 “마라비안” 교파를 설립하였다. 그가 독일에서 영국으로 추방 당하기 전에 독일의 유명한 지역을 Tour를 하던 중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한 미술관에 들렀다. 그곳에는 그의 시선을 잡아 끄는 그림 한점이 있었다. 그림의 제목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지상으로 내려와 고통받는 모습을 그린 도메니코 페티의 작품 “에케 호모”(이 사랑을 보라)였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진젠도르프는 무릎을 꿇고 평생 십자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그림에는 아래와 같은 라틴어도 덧붙여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
만일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그렇게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할 할까? 그는 이 그림을 보고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지만, 당신을 위해 행한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당신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겠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그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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