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고,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것이다.
“죄”, “저주”, “멸망”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실패의 상징성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었던 모든 실패의 상징들이 십자가에서 사라졌다.
십자가상에서 소멸되었다.
주홍같이 붉은 죄가 흰눈같이 양털같이 희어졌다.
무거운 나의 저주와 정죄가 십자가상에서 무죄의 선언과 함께 자유와 해방의 선언이 선포되었다.
좌절과 실패의 어두운 인생이 십자가상에서 영원한 승리자라고 선포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의 자화상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것은 분명 전에는 실패자였으나 이제는 승리자의 모습이다.
전에는 타락자였으나 지금은 생명자이다.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이며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실패자였다.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실패자로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망에서 부활하심으로 또한 함께 부활하였음으로 우리는 또한 승리자가 되었다.
실패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죽음 없이는 또한 부활도 없다.
실패 없이는 또한 성공도 없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을 잘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거룩한 생활을 살아가는 민족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불순종의 백성들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온갖 악을 다 행하던 민족이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더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느니라.“(신7:7-8)
지극히 작은 민족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피택하셨다.
연약하였기 때문에, 부족하였기 때문에, 지극히 작았기 때문에 선택하셨다.
왜?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인애하심과 사랑 때문이라고 대답하신다.
그래도 강하다고 말하겠으며 그래도 크다고 자랑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셨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추하고 더럽고 더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셨다.
이 사실이 우리를 눈물 나게 한다.
이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렇다.
전에는 우리가 다 죄악투성이였을지라도 과거를 더 이상 보시지 않으시고 인애하신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라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더욱 신뢰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라도 그분을 믿음으로 살아야하지 않을까?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newlife0688@gmail.com
(832)205-5578
www.houstonnewlif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