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초등학교를 옛날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국민학교 교정의 한쪽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여러가지 놀이기구들을 마련해 두었는데 그 중에서 친한 친구와 함께 시이소게임을 즐겨했던 것 같다. 친구는 유난히 몸무게가 많이 나간 아이라 항상 발란스가 제대로 맞지 않았지만 참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이소게임은 양쪽의 발란스가 잘 맞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발란스가 잘 맞아야 한다. 기도와 말씀의 발란스를 잘 맞춰야 한다. 말씀없이 기도에만 전념하면 잘못된 기도에 빠지기 쉽다. 기도는 말씀에 따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에만 전념하면 머리는 커지는데 행함이 없는 교만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기도와 말씀의 발란스를 잘 맞춰나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봉사와 말씀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봉사에만 열중하면 반드시 시끄러워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6장에 잘 나타나 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엄청난 대형교회가 되었다. 당시 시대의 상황때문에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많이 교회로 몰려왔다. 그래서 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빠졌다. 구제와 봉사의 일에 전념하다보니 교회내에 파벌이 생겼다. 헬라파와 유대파가 심각하게 대립을 하자 교회가 깨어질 위기에 봉착했다. 그 때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봉사의 일에 집중하도록 일곱집사를 뽑아 봉사와 구제의 일을 전담시켰다.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했다. 드디어 봉사와 기도와 말씀의 교회사역이 발란스를 마추게 되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교회가 더욱 부흥하고 영적인 힘이 생겼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십자가와 부활의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후에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동정녀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이른 새벽부터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으로 찾아갔다는 사실이다.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여인들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러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그런데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그 여인들은 “시체를 위하여” 향품을 준비하고 “무덤을” 찾았으며 “시체를” 찾고 “죽은 자”를 찾았다고 기록한다. 다시 말하면 잘못된 것에 부지런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눈부신 천사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5)며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6) 책망을 하였다. 그리고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라”(7-8)고 하였다.
이 여인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깨달아야할 점은 무엇일까? 우리도 이 여인들처럼 무덤에 뭍힌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 날마다 십자가에서 철철 피를 흘리고 계신 예수님만을 찾고 있지는 않는가? 십자가와 죽음에 지나치게 치우치지는 않는가? 물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죽음이 없이는 결코 다시 살지 못한다. 과거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새로워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발란스를 잘 마추지 못한다면 분명히 한쪽에 치우쳐 머물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십자가에 달려 있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해야 한다. 왜 아직도 십자가에 머물러 있는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었으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부활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만일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라면 우리는 이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다는 말이 아닌가? 내 안에 사신 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 십자가에 메달려 있어야 할까? 아직도 십자가에서 철철 피를 흘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 왜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고 있을까? 그것은 아직도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어서 옛날에 저질렀던 죄와 허물을 버리지 못하고 그럴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해 달라”고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진정한 부활은 과거의 허물과 죄를 깨끗이 청산하는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면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죽지 않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했으면 이제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해야 한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newlife0688@gmail.com
(832)205-5578
www.houstonnewlif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