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저스 다이제트에 있는 목동이야기가 기억난다. 서양목동과 동양 목동을 비교한 글이다. 서양목동은 가축을 뒤에서 몰아간다. 서부영화에서 종종 보는 장면인데 목자가 양떼나 혹은 소떼를 몰 때 그들을 앞서가게 하고 목자는 목장개들을 풀어 뒤에서 몰아간다. 고삐를 풀어 때리기도 하고 곁길로 가는 녀석은 올가미를 걸어 붙들어 오기도 한다. 이리 때리고 저리 때리고 앞으로 그냥 몰아 부친다. 그런데 동양목자는 양을 앞에서 인도한다. 목자가 앞서가면 양떼들은 일사불란하게 뒤를 따라 간다.
이런 두 종류의 풍속에 대한 차이점을 비교했다. 가축들을 앞에 놓고 뒤에서 몰고가면 어떻게 될까? 앞에 놓고 뒤에서 몰 때는 결국은 강권이 발동한다. 왜 그래야 할까? 앞으로 몰고 가려고 하면 할수록 양떼들은 두려워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뒤에서 계속 위협을 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간다. 잘못된 길로 가는 녀석은 때려가면서 인도한다. 이것이 독재자들의 방식이다.
그러나 앞에서 목자가 이끌어 갈 때는 어떻게 될까? 목자는 양떼들이 뒤에서 따라올 것을 믿고 앞을 향해 인도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목자들의 방식이다. 예루살렘의 성지여행자들을 위한 안내광고를 본 일이 있는데, 10살도 안되 보이는 어린 목동이 양 삼백 마리를 인도하는 장면을 봤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어린 소년 목동은 때로는 피리를 불고 휘슬을 불면서 앞서가면 양떼들은 그 소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구름 떼처럼 움직였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조그만 소년 목동이 댕강댕강 급하게 종을 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양떼들이 일제히 목동을 쳐다본다. 그때 평화로운 음률로 피리를 불면 일제히 목동을 따라 간다. 이탈자가 하나도 없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식이다.
그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모든 성도들이 그처럼 목자 예수님을 따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모든 성도들을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할 수 있을 텐데… 목자는 양떼들이 따라올 것이라고 믿는다. 또 가끔 따라오다가 쓰러지는 녀석도 있고 또 비틀거리는 녀석도 있다. 그러면 목자는 그들을 들쳐 업고 간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양이 목자를 믿고 앞서가면 양떼는 또 목자를 신뢰하고 따라간다. 그래도 따라오지 않고 살짝 몰래 샛길로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이리떼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버림받은 양일 수밖에 없다.
오래전의 이야기인데 언젠가 한번 어느 여성도가 말하기를 자기아이가 벌써 말썽꾸러기라서 걱정이라고 했다. 게다가 한마디를 더해 제 애비 닮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아이가 몇 살인데요?”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했다. 그래서 속 썩이지 말라고 위로를 해 드렸다.
“어린아이들이 자라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거니까 지나친 간섭은 도리어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부모님께서 본을 보이시고 앞서 가시면 따라오지 않을까요?”
위대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여사는 그 아들이 형편없는 방탕아로 살 때도, 제 맘대로 죄악의 길을 걸어갈 때도, 그저 밤낮으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고 한다. 30년을 그렇게 기다렸다.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믿고 전혀 낙심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오로지 하나님 앞에 아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믿고 기도하고 기다렸다. 결국은 그 아들이 가출하여 로마로 갔다가 위대한 목사 암무르스를 만나고 성자가 되어 돌아왔다. 성 어거스틴이 성자라는 칭호를 받고 돌아오기 전에 매일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귓가에 메아리 쳐 울렸다고 한다.
“한 목자의 눈으로 본 시편 23편”(A shepherd looks at Psalm 23)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 필립 켈러(Philip Keller)는 아버지가 아프리카 케냐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일할 때 케냐에서 탄생하고 자랐다. 그는 한 때 8년 동안 목자생활을 했는데 실제경험을 토대로 양의 습성을 관찰한 책이다.
그는 지금은 토론토대학(University of Toronto)에서 토양학을 전공한 토양 학자이다.
이 책에서 양의 습성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한다면 양은 매우 나약한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양은 자기를 스스로 보호 능력이 전혀 없다. 게다가 거북이처럼 한 번 뒤집히면 결코 혼자서 몸을 뒤집고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 목자가 구해주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죽게 된다. 양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동물이다. 또 양은 시력이 나쁜 동물이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짐승이 가까이 다가와도 잘 보지 못한다. 그냥 놔두면 독초를 먹거나 더러운 물을 마셔서 병에 걸리거나,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다가 죽게 된다. 시력이 나쁜 양은 보통 시각장애인들이 그렇듯 다니던 길로만 가려 하고, 풀을 뜯던 곳에서만 뜯으려고 한다. 그래서 양들이 다니는 길을 보면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 있다. 양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다. 목자가 얼마나 양에게 필요한지 알 수 있다. 선한 목자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 양의 일생이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다. 다른 동물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없다. 뿔이 없어서 적이 공격하면 대항할 능력이 전무하다. 적이 공격해 오면 물어 뜯을 수 있는 송곳니도 없다. 그저 무방비상태로 잡혀 먹히는 나약한 동물이다. 자기보다 더 작은 동물한테도 꼼작 못하고 잡혀 먹힌다. 혹시 무서운 짐승에게 잡혀 먹는 순간의 양의 얼굴을 본적이 있는가?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Program에 보면 양이 잡혀 먹는 순간에도 발버둥을 치거나 두려운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전혀 대항할 힘도 없이 순진한 얼굴로 그저 잡혀 적힐 뿐이다. 죽어가면서도 그야말로 순하고 착한 양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런 나약한 양에 비유하신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누가복음 10장에보면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전도훈련을 보내신다.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
세상을 이리떼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양을 성도로 비유한다. 그만큼 성도는 이 세상에서 연약한 존재이다.
그렇다. 목회를 하다 보면 목사가 뒤에서 하나님의 양떼들을 밀고 간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자녀들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밀어 부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것을 깨달었을 때는 이미 아이들은 나름대로 다 자란 뒤였다. 무엇일까? 앞서가는 길 밖에 없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양떼들 앞에 “앞서가면… 따라온다”(요10:3-4)고 하셨다. 본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양떼들이든 자식들이든 따라오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목자이다. 그것이 선한 부모이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앞서 간다”는 말은 “희생”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없이는 결코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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