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羊)의 문(門)이라.”(요10:7)
“양의 문”은 “The Gate of the sheep” 이 아니라 “The Gate for the sheep”이다. 즉 양떼를 위한 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통로이다.
느헤미아 3장에 보면 처음 양의 문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가 되어 노예의 삶을 살았다. 70년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느헤미아를 베벨론에서 유대로 귀환을 시키셨다. 목적은 훼파되고 불타버린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기 위함이었다. “예루살렘 성”는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상의 “새예루살렘 성”의 예표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성벽을 재건할 때 양문(羊門)을 가장 먼저 만들도록 하셨다는 점이다. 그것도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 형제 제자장들과 함께 성문 바로 첫번째로 양문(羊門 The Gate for the Sheep)을 건축하게 하셨다.
왜 양(羊門)을 가장 먼저 만들게 하셨을까? 백성들의 죄를 대신한 속죄의 제물로서 어린양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城)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특별히 가장 먼저 만들도록 하셨다. 어린양들을 이끌고 그 양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가서 어린양들은 붉은 피를 흘린 체 속죄의 제물이 되었다. 속죄의 제물은 그 문을 통과하여 피흘려 죽임을 당했다. 바로 그 구원의 문, 속죄의 양문은 곧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이를 확증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에 바로 느헤미아가 건축했던 예루살렘성의 양문을 찾아가셨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문 바로 곁에 있는 베데스타 연못을 찾아가셔서 38년된 앉은뱅이를 치유하셨다. 예수님께서 왜 하필 그곳을 찾아가셔서 병자들을 치유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계시되었던 양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려주시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로소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양의 문을 통과하여 죽임을 당하신 곳은 어디였는가? 거칠고 메마른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이었다.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은 이 세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에스겔 37장에 나타난 생명 없는 해골들이 가득 찬 골짜기와 같은 곳이다.
양의 우리는 보통 산간벽지에 있다. 원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목자가 없이는 절대 양을 방목하지 않는다고 한다. 목자 없는 양떼는 금방 흩어지고 만다. 산간벽지의 땅은 거칠고 돌멩이들이 많다. 대부분의 목장들은 고원지대에 있다. 따라서 급경사와 절벽이 많았고 바위투성이다. 메마른 세상의 상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가 없으면 양들은 꼴을 얻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웅덩이에 빠지고 절벽에서 떨어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지방의 양떼들에게 있어서 목자의 존재는 생명줄과 같다. 목자가 곧 양식이고 구원이다.
그렇다. 거칠고 황폐한 해골이라고 불리우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양떼들을 위한 진정한 마지막 양문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신 유일한 양의 문이시다. 양의 우리에는 문이 꼭 하나만 있다. 그 문으로만 들어오고 나가야 한다. 다른 문은 없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요14:6)
예수님은 오직 유일한 생명(The Life)의 원천이시다. 생명이란 성장(成長)을 의미한다. 성장이 없이 존재만 하는 생명은 온전한 생명이 아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들이다. 존재하는 것과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존재는 있는 그대로 가능하지만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요 지속적인 싸움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하나님만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양의 우리는 어디일까? 교회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이다. 교회라는 양떼의 우리에는 반드시 양문(羊門)이 존재한다. 양문(羊門)은 예수님이시다. 골고다의 거칠고 황량한 언덕의 십자가의 한 가운데서 피흘려 자기 몸을 몸소 내어 주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해골 같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고 세상에 있는 양떼들을 불러 교회라는 우리 안으로 구별하셨다. 그리고 친히 양떼를 지키는 양문이 되셨다. 구별됨이란 무엇인가? 거룩이다. 교회는 더러움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죄악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양의 우리가 구별된 거룩함을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양떼는 교회의 양문을 드나들며 꼴을 받아먹어야 한다. “꼴”은 말씀의 양식이다. “꼴”을 먹지 않고 교회를 드나들면 어떻게 될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영혼이 핍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렇다. 주님께서 친히 양문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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