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국의 어느 SNS에 동영상과 함께 이런 기사가 떴다. 경남 마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어린 아이가 사나운 개에게 물려 죽은 사건이다. 아직 유치원에 들어기도 전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길가에 배회하는 똥개에게 물려 죽은 것이다. 참으로 참담하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마음이 더욱 슬픈 것은 그와 같은 참상의 현장에 10여 명의 이웃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욱 분노가 치밀은 것은 개에게 물린 장면을 누군가 동영상으로 찍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런 처절한 현장을 목격하고도 그 사나운 개의 아가리에서 어린 아이를 건져 주려고 뛰어들지 않았다. 사나운 개에게 자신이 물려 찢길까 두려워서 수수방관하였다. 실로 기가 막힌 일이다. 이것이 현시대의 한 단면이다. 무엇 때문인가?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이다.
그 모습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면이 연상된다. 예수님을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혀 가시자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도망을 쳤다. 제자 마가는 예수님이 로마 군인에게 붙잡히자 즉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발가벗은 모습으로 도망을 쳤다(막14:52). 제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고 장담했다. “주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베드로의 장담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번 주를 부인하고 말았다. 실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기심의 극치이다.
베드로는 그 놀라운 신앙에도 불구하고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공포는 인간의 사고와 판단을 그르치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것이 공산주의자들의 통치방식이다. 역사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 공산주의는 공포정치로 인간을 개돼지로 만들어 버린다. 이기심의 극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는 승리와 좌절의 점철이다. 승리의 역사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 성취된다. 가나안 정복은 열 사람의 비겁한 정탐꾼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창조적 소수에 의해 완성되었다. 모든 창조적 소수는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긍정적인 용기(The Courage to be)라고 할 수 있다. 기드온의 미디안 전쟁은 수만명의 군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300명의 소수에 의해 미디안의 12만5천명을 격멸시킨 전쟁이었다(삿7-8). 다윗과 블레셋의 전쟁도 강력한 신앙과 용기 있는 믿음의 다윗에 의해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사람을 택하지 않고 용기있는 사람을 택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로 의연히 가셨다. 인간 최악의 고난의 길이다. 주님은 그 고난의 잔을 피하려고 처절한 기도를 하기도 했다. 죽음은 고통이다. 슬픔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비겁해지기도하고 치졸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고난은 불행이다. 그러나 성서적 의미에서 고난은 신자의 영광이다. 고난이 아픔이기는 하지만 슬픔이기는 하지만 아픔과 슬픔을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이길 때 그것은 영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기심을 극복한 희생이다.
호주의 작가 패트릭 화잇트(P. White)는 197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작가수업을 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했다. 열심히 저작 활동을 하였으나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나머지 그의 나라 호주로 돌아와 나무꾼이 되었다. 그러나 삼림의 계곡 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았다. 꿈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한 용기라 할 수 있다. 나무꾼이 되었지만 그는 계속 소설을 썼다. 그래서 발표한 작품이 “행복한 계곡”과 “인간의 나무”이다. 그는 나무 숲으로 우거진 산림과 계곡 속에서 진정한 통찰력을 발견한 것이다. 마침내 세상의 빛이 그에게 이르렀다. 계곡에서 나무를 자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창피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생의 “행복한 계곡”으로 여겼다. 그는 그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분량만큼 진보한다”고 말했다. 고난을 통해 그는 자신의 진보를 성취한 것이다. 드디어 영광스러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인간의 나무”의 서두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인간은 이기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겸손하게 될 때에,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깨달은 때에 그는 가장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먼 산골짜기에서 나무꾼이 되었을 때 자신의 이기심을 버린 겸손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올려 주신다.”
예수님은 제자의 배신과 버림받은 쓰라린 고통을 맛보셨다. 유대교의 종교 모리배들과 지도자들에 의해 무죄한 분으로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의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심판을 대신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이루셨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킨 자리라고 한 것이다. 그 길이 이기심의 자리였는가? 다만 자기 자신을 버리는 자리가 아니었는가? 이기심을 버릴 때 결과는 나도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린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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