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만남으로 시작된다. 가장 먼저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난다. 한자로 인간(人間)이라는 뜻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통해서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생은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자식 관계, 부부관계, 이웃관계, 친구의 관계, 교인들의 관계, 회사원들의 관계를 통해서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만남을 통한 관계성이다. 하나님과 만남의 관계, 이웃과 만남의 관계이다. 좋은 만남, 좋은 관계, 신뢰의 관계, 믿음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가지면 행복한 인생이다. 관계가 나쁘면 고통이 시작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한 생활, 행복한 인생은 좋은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좋은 관계는 서로를 알아야 가능하다. 예수님께서도 관계성을 매우 강조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요10:14-15)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서로 아는 관계였다. 우리도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예수님과 우리와의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구원은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관계이다. 서로 알아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안다”는 헬라어로 (기노스코)이며 히브리어로는 “야다”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어 “야다”와 헬라어 “기노스코”가 “남녀가 동침하다”와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야다)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창4:1)할 때, “동침”이라는 말과 “알다”라는 말을 같은 단어로 사용한다. 신약에서도 동정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기노스코)하지 아니하더니…”(마1:25)라고 할 때, “동침”이라는 말을 “알다”(기노스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고 동정녀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남녀가 서로 아는 관계를 가질 때, 새생명의 임신을 했다는 말은 심오한 뜻이 있다. 새생명의 잉태는 서로 알아야 가능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진리를 알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걸 알 때 거듭나는 새생명으로 탄생된다는 뜻이다. 관계는 서로 알 때 시작한다. 구원도 아는 데서 시작된다. 알면 새생명이 탄생한다.
유대인 철학자인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인간관계의 첫번째는 “나와 그것”(I-it)의 관계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상대방을 “나와 그것”(I-it)으로 여기려 한다.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너를 만나고, 너를 이용하고 너를 버리는 관계가 바로 나와 그것의 관계, 상대방을 물질이나 도구로 보는 관계이다. 특히 공산주의나 전체주의는 지배자들이 인민을 “나와 그것”(I-it)의 관계로 본다. 인민을 내 권력을 지키는 도구로 본다. 상대방을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아닌가를 따진다. 비인격적이며 비양심적인 관계이다. 나를 위하여 상대방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베풀어 주지는 않고 요구하고 이용하려고만 한다.
두번째로는 진정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너”(I-You)의 인격적 관계이어야 한다. 나는 너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나는 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 이런 만남을 그는 “나와 너”의 관계라고 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관계,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이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이다. 공존의 관계이다. 그런 관계는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당신”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불화가 생기고 더 나아가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세번째로는 “나와 하나님”(I-God)의 관계이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나와 그것”(I-It)과의 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과 전체주의자들은 가장 기독교를 두려워하고 말살하려고 한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때, 비로소 진정한 “나와 당신”(I-You)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기노스코”와 “야다”의 아는 관계를 가질 때, “나와 당신”의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영생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맺힌 기도를 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님을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해야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 신앙고백이다. 예수님과 나는 주종(主從)의 관계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어느 날 예수님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요8:19)고 물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희는 나도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19)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다.”(골1:15) “하나님은 영”(요4:24)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도리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를 거부하고 조소하고 있다. “네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냐?”며 모독을 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요8:22,24)고 하신다. 예수님을 모르고 죄사함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인생은 만남이다. 만남을 통해서 관계성이 시작된다. 서로 알아야 관계성이 형성된다. 예수님을 알면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 때 비로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예수님과 믿음의 관계가 형성되면 자연적으로 아웃과의 인격적 관계, 화평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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