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은 특이하게도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에 대한 치유의 사건을 매우 자세하고도 길게 지면을 할애한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장 불행한 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찾아 가셔서 자유케 하시고 최악의 어둠에서 최상의 빛으로 옮겨 주셨다. 여기에 보면 한 시각장애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장면이 소개된다.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눈을 뜨고 싶은 소원마저 잊어버린 체 여전히 구걸을 하고 있었다. 안식일 날이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안식일 예배를 드리려고 성전문을 들어가시다가 소경을 보셨다. 그리고 진흙을 짓이겨 눈에 발라 주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소경은 순종하였다. 그랬더니 눈을 뜨고 보게 되었다. 생전 처음 빛을 보았다. 난생 처음 색깔이 보였다. 어두움이 사라졌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좇아와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고쳐 주셨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항거할 수 없는 은혜라고 말한다. 전적인 은혜였다. 어떤 조건도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찾아오셔서 전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그를 불러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심문을 했다(요9:10)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나더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요9:11)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누구라 하느냐?”(요9:17)고 물었다.
“선지자입니다.”(요9:17)
그는 억압자들에게 불려가 “예”를 “예”라고 “아니오”를 “아니오”라고 고백했다는 이유로 출교를 당하고 말았다. 억압자들은 “예”를 “아니오”로 “아니오”를 “예”라고 대답하기를 기대한 것 같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교회에서 쫓겨났다. 어떤 면에서 불의한 세력에게 쫓겨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3만5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만일 그들이 아직도 이북에 살고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탈북을 했는데 갈 곳이 없었다면 얼마나 불행했겠는가? 그러나 자유의 나라로 갔으니 다행스럽지 않는가? 무엇보다는 인간이 누려야할 자유를 되찾았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종 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16세기에 종교개혁을 한다는 이유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출교를 당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로마 카톨릭의 출교를 당했는데 갈 곳이 없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그러나 그로인하여 더욱 담대한 종교개혁자가 될 수 있었다. 청교도들이 영국 교계로부터 출교를 당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들이 갈 곳이 없었다면 얼마나 불행했겠는가? 그건 비극이 아니었다. 그로인하여 목숨을 걸고 미대륙의 품으로 건너와 기독교의 나라 미합중국이 탄생하는 주춧돌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재판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그대로 단순하게 고백했다고 해서 유대교의 출교를 당함으로 인하여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유대교는 그를 어디로 내쫓았는가? 예수님의 품안으로 내쫓아주었다. 내쫓았는데 갈 데가 없었다면 불행했겠는가? 막상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고 소외감과 허탈감으로 가득 찼을 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예수님의 손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 받은 사람이 유대교의 출교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그냥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를 친히 찾아가셨다. 그리고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9:35)고 물으셨다. 결국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9:38)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을 찾아 가신다. 찾아가셔서 회복시키시고 구원시키신다. 어떤 의미에서 시각장애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지 않았다면 출교를 당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 때문에 출교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 가셨다. 무슨 말인가? 성자 하나님께서 사망 가운데 있는 세상을 찾아오셨다. 인간을 만드신 책임을 다하시려고 예수님은 결자해지(結者解之)하려 오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를 믿다가 교회를 다니다가 봉사를 하다가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소외감을 느끼고 교회를 떠날까 말까 하는 시험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지금 바로 내 곁에 계신 우리 주님, 내 안에 성령으로 임재하신 그분을 믿으면, 고난을 딛고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분이 어떤 고난과 희생을 치르셨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자각할 때 우리는 시험을 믿음으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그는 예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증거자가 되었다. 이 불쌍한 거지 시각장애인은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자유인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면서, 내게 자유를 주신 그분을 높이며, 찬양하며, 감사하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갔다. 자유인에게 있는 용기, 자유가 주어져도 용기없는 사람은 자유를 잃어버리지만, 이 사람은 참으로 자유인으로 사명을 감당한 훌륭한 자유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것이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다. 다니엘 웹스터는 “하나님은 자유를 사랑하고 그것을 항상 보호하며,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에게 자유를 허락하신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영적인 소경이었다. 적어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빛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보지 못했다. 오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사명받은 자유자로 살게 하려는 것이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homas Jefferson)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동시에 자유를 주셨다.”고 말했다. 생명이 왜 소중할까?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생명은 바로 생명과 함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만일에 누군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작은 문틈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고 그 창공에서 자유롭게 날으는 새를 바라보고 얼마나 부럽겠는가? 하늘을 나는 새, 바다에 있는 물고기, 수많은 생명에게 자유를 주신 것처럼 인간에게도 자유를 주셔서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자유는 정말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에덴동산에 자유가 있었다는 것은 에덴동산에 생명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했다는 뜻이다. 자유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창조주로부터 주어졌다. 자유의 반대는 노예다.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보다 더 비극은 없다. 자유보다 더 큰 기쁨과 축복은 없다. 러스키는 말하기를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다. 자유를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린 것이다. 다 찾은 것이 자유이다. 자유를 가진 자는 모든 가능성이 있다. 자유를 잃어버린 분은 모든 가능성이 끝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오셨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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