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은 4복음서에 각각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28:18-20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향한 지상명령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지상명령의 수행방법과 능력을 예수님의 지상계명(至上誡命)이라고 한다. 4복음서의 지상계명은 대표적으로 두 군데에 나타난다. 첫째는 마태복음 22:37-40이다. 사랑의 계명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요한복음 21:15-19이다. 역시 사랑의 계명이다. 주님의 지상명령수행은 오직 하나님의 희생의 사랑으로 해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같은 방식의 질문을 세번씩 반복해서 하셨다. 첫번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15)고 물으셨다. “아가페”(Agape)는 무조건적 희생의 사랑이다. 상대의 수준, 환경, 싫음과 좋음, 어떤 상황에 상관없이 내어 주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다. 아가페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어떤 경우에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느냐?”고, “네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네 목숨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네 생활, 네 과거, 네 소유, 네 명예보다 나를 더 우선적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주님을 사랑(Philea)하는 줄 주님께서 알고 계시나이다.”(15)
“필리아”(Philea)는 친구간의 우정의 사랑이다. 조건적 사랑이다. 조건이 변하면 동시에 사랑도 변한다. 베드로로서는 그것이 주님께 드릴 수 있었던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두번째로 다시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16)
그러나 베드로는 이번에도 질문의 뜻을 깨닫지를 못했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께 대답 드린다.
“내가 주님을 필레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16)
아직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답변이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의 한계였다. 3년 반 동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사랑을 가르쳤으나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셨다. 놀랍게도 베드로에게 세번째로 이렇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럼) 네가 필레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17)
주님께서는 또다시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을 묻지 않으셨다. 나무라거나 꾸짖지도 않으셨다. 정말 “네가 친구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으심으로써 베드로의 불완전한 고백을 고스란히 수용해 주신 것이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여전히 이르지 못했지만 친히 베드로의 수준으로 주님 자신을 낮추어 주셨다. 다시 말하면 형편없는 베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다. 바로 이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렇다. 사랑이란 나에게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의 자리로 내려 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사랑이란 일방적으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시다.
그렇다. 사랑이란 상대가 나의 수준에 맞추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수준에 나를 맞추어 주는 자발적인 자기 부정의 능력이다. 이것이 사랑의 법이다. 내가 사랑할 대상이 누구이든 그들의 모든 허물과 유치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먼저 수용하는 것이다. 아가페의 사랑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더럽고 추한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시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뜻밖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17)
세번째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근심을 하였다. “근심하다”(Lupeo)는 말은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지게 아파서 비탄에 빠진다”는 의미이다. 혹시 어떤 일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지게 아픈 경험이 있는가? 베드로는 왜 그랬을까? 진정한 사랑을 모른체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 가셔서 부족한 그대로 온전히 품어 주시자, 그 사랑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았다. 형편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 이 사랑이 아니면 결코 지상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 이 사랑이 아니면 아무도 감동받지 않는다. 감동받지 않으면 아무도 변하지 않는다. 이 사랑이 아니면 아무도 순종할 수 없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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