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범사”란 영어로 “Give thanks to in all circumstances”(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하라)이다. 인생은 여러가지 희로애락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은 할 수 없어도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먼저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자. 시편 107편에 보면 강사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 준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인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왜 그럴까? 본성적으로 죄성을 타고난 우리는 틈만 나면 죄를 저지르고 실수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럴 때 마다 징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 땅에 아무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감사할 이유이다.
그리고 “그는 선하시다”라고 말씀한다. “선하다”는 히브리말 원어의 뜻은 “어린 양의 입”라는 의미를 가진다. “어린 양의 입”이 왜 선하다는 걸까? 우리가 종종 동물의 왕국 같은 TV Channel을 보면 사자나 늑대에게 잡혀 먹는 연약한 어린 양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늑대에게 잡혀 먹는 어린 양의 얼굴이 두렵거나 겁을 먹거나 외마디 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티없이 선한 모습으로 반항없이 잡혀 먹힌 모습을 보게 된다. 한 마디로 반항 없이 잡혀먹히면서도 마치 순복하는 모습같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순히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으로 나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외쳤던 한 마디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였다. 그렇다. 어린 양 예수님을 그래서 선하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사실을 이사야 53장에서 자세히 계시하고 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7)
악한 동물들에게 순순히 잡혀 먹힌 어린 양처럼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위정자들에게 순순히 죽임을 당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우리를 대신한 대속의 제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으로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려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선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환난 속에서도 감사의 신앙생활을 했던 고린도교회를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
극심한 환란의 시련 가운데서도 어떻게 그들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할 수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드린 연보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믿음과 정성과 사랑의 중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1장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성전에 놓인 연보함 앞에서 신자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 보셨다. 부자들은 많은 돈을 넣고 그 중에 어떤 가난한 과부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두렙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 강단에 올라가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3-4)
그렇다. 하나님은 금액의 크고 적음을 보지 않으신다. 숫자의 크고 작음을 보지 않으신다. 중심을 보신다. 그 과부는 가난했다. 내 놓을만한 것이 변변치 않았다. 감사하고 싶어도 드릴 게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동전 두렙돈을 드렸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많이 드렸지만 결코 칭찬하지 않으셨다. 왜 그들이 가진 많은 것 중에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진 전부를 몽땅 내 놓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전부를 드린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차원 높은 감사이다. 없는 것 가운데서도 극심한 환란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은혜를 잊지 않고 드리는 감사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감사가 아니겠는가!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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