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성의 과부의 아들의 장례식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면서 과부 곁에 있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눅7:13b)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과부의 슬픔에 동참했다.
함께 슬퍼했다.
그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과부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측은지심이 있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이 무엇인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
이웃을 향하여 측은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눅10).
어떤 사람이 길가다가 강도를 만나 모든 걸 다 빼앗기고 발가벗겨진 채 길가에 버려졌다.
두들겨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있는 것을 다 강도들에게 빼앗겼다.
한 제사장이 길가다가 그를 보고 도와주지 않고 피하여 지나갔다.
한 레위인도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와주지 않고 피하여 지나갔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약을 발라주고 응급처치를 해 준다.
그리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다.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차후 발생할 모든 비용까지 계산해 주겠다고 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는 측은지심이 없었다.
측은지심이 없는 제사장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 직분일 뿐이다.
측은지심이 없는 봉사자도 알맹이 없는 껍데기 봉사일 뿐이다.
그들은 측은지심이 없었으므로 행함도 없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피했다.
그러나 소외계층의 사마리아인은 측은지심이 있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눅10:33)
그리고 피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들로 그 상처를 싸매” 주었다(눅10:34).
그리고 “돌보아” 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측은지심이다.
예수님의 질문이 무엇인가?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눅10:36).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기중심적이다.
대부분이 “누가 내 이웃이냐?”고 질문을 해도 “과연 나는 저 사람의 이웃인가?”라고 질문하지는 않는다.
누가 먼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어야 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리하면 그들도 진정한 당신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이다.
‘왜 나에게는 해 주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먼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먼저 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들도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 줄 것이다.
사랑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사랑해야 한다.
그리하면 사랑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기심을 받을 것임이요.”(마5:8)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자.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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