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인간존재가 참 연약하고 무능하다는 생각을 한적이 없었다. 세계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멈춰 섰다. 모두가 다 천하에 제일가는 자만심과 잘난 맛에 살아가던 인간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앞에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갇혀 버렸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였다고 자부하던 인간세계가 우한 코로나바이러스에게 꼼짝을 못한 체 당하고 있다.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듯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바벨탑을 쌓고 살던 인간계계가 이처럼 바이러스에게 맥을 못 추다니 인류문명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이 실수로 했든 고의로 했든 이 세상에 역병이 창궐하여 인류문명이 완전히 그 앞에 무너져 내린 이 상황은 어쩌면 인간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인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성경의 말씀 앞에 더욱 겸손 해져야 한다. 인생을 마치 바람 같다고 했다. 바람이 지나가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한다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 옳인지…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시103:15)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살아 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빛이 있기 마련이다.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생명이 있다. 우리의 소망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다. 우리의 소망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강이다. 눈 속에 핀 꽃을 “설중화”(雪中花)라고 한다. 설중화(雪中花)는 아무리 눈보라가 내리쳐도 눈 속에서 피는 꽃을 보면서 희망의 빛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며칠 전에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백악관 브리핑을 하면서 “터널 끝에서 희망의 불빛이 보인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희망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려울수록 희망의 끈을 붙들어야 한다. 어두울수록 빛을 찾아야 한다. 고난이 올수록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주린다는 말은 배가 고프다는 말이다. 배가 고파야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다.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다가 얻을 때 바라지 않고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 되지 않을까?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에게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고 원했던 모든 것이 다 끊어졌다. 두려움과 공포가운데 어떤 제자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고 어떤 제자 둘은 고향마을 엠마오로 되돌아 갔고 어떤 제자들은 그들이 늘상 모이던 마가의 다락방에서 떨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묻혔던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은 적막이 감돌았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왜 고난이 필요할까? 왜 죽음이 필요할까?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죽음의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야만 했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소망의 길, 구원의 길이 열렸다. 죽어야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왔다.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으심이 곧 예수님의 영광이시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고난을 통과해야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는 점이다. 고난은 나를 버리는 훈련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을 괴로워한다. 그러나 나를 버려야 주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머물 수 있다. 죽어야 새생명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고난 없는 영광을 바란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해야 영광이 주어진다는 비밀을 알아야 한다. 어떤 찬양 집회에서 젊은 청년들의 T-Shirts에 “Knowing Me is Loving Me”라고 새겨져 있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알아야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아야 구원이 있다. 거기에 거듭남이 있고 새생명이 있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죽을 수 있다. 예수님을 알면 내 것을 버리게 된다. 안다는 것은 믿는다는 말이고 사랑한다는 말이다. 이제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이 말씀은 세상의 방법과 정반대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세상 방법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애쓰고 노력해야 비로소 자신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정반대이다. 차원이 다르다. 관점이 다르다. 가치관이 다르다. 죽어야 산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한 알의 밀알 속에는 신비한 생명의 법칙이 숨겨져 있다. 생명의 비밀이다. 생명이란 신비한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소망이 되었다. 오늘의 두려움이 반드시 우리에게 터널 끝에 보이는 불빛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오늘의 고난이 가치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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