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이 말씀이 좋아서 수십년전부터 줄줄 외면서 기도하곤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있었다. 왜 기도와 간구를 하면 직접적으로 응답해 주시리라 혹은 이루어 주리라고 하지 않고 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하실까?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기 시작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령, 어느 날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특이한 장면이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달아 메어 내렸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에게 일어나라 걸으라는 명령대신 “소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는 말씀으로 치유하여 주셨다. 중풍병에 걸린 근본적인 이유가 그 사람의 죄 때문에 비롯되었음을 아셨다. 그는 고민하고 번민하고 심한 불면증과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심적고통 때문에 중풍병에 걸리게 되었음을 아시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 어떤 문제로 인한 두려움과 근심걱정에 집중하면 평강은 사라지고 고통과 불안이 지배하게 된다. 마음의 평강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하셨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먼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해결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평강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신자들에게 주신 하늘의 평안이다. 이 평안은 이 세상에는 없는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에게만 주신 하늘의 평안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성령은 과연 어떤 평강일까?
첫째,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죄사함 받는 평안이다. 인간의 모든 불안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음으로써 벌거벗은 몸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두려워 동산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겼다(창3:8). 그러나 죄사함을 받으면 마음의 평안이 회복된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겼다(롬8:2).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엡2:8). 원수된 우리가 이제는 성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둘째,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평강이다. 성령은 평강의 영이시다. 하늘나라는 평강의 나라이다. 성령의 은혜가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하늘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 이 평안은 두려움을 이긴다. 이 평안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흔들리지 않게 해 준다.
셋째,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의 평안이다.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은 우리에게 주신
가장 확실한 평안이다. 스데반 집사가 사람들의 돌팔매질로 돌무더기 속에 묻혀가면서도 그 얼굴에서 영광의 빛을 빼앗기지 않고 빛날 수 있었던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행7:58-60). 만일 그 마음 가운데 참 평강이 없었다면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는 고백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천국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누가 감히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처럼 담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천국의 소망은 최상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새천년이 다가오기 전에 학자들은 “불학실성의 시대”(Uncertain Era)라고 불렀다. 모든 인류가
불확실한 장래의 두려움을 느낀 체 새천년을 기다렸다. 새천년이 오자 그들은 “Postmodernism Era”(탈현대주의 시대)라고 불렀다. 기존적인 절대성과 인류의 도덕성이나 가치관의 기준이 개인적인 관점에 따라 달라졌다. 그리고 10년전에는 “파괴의 시대”(Destructions Era)라고 불렀다. 그동안 인류가 지켜온 기존질서와 가치관과 결혼관과 사고체계가 파괴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이제 많은 학자들은 오늘 날을 “두려움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파괴되고 무너져 내린 후에는 결국 두려움이 지배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결국 평강이 사라지는 시대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무섭고 두려운 십자가의 고난을 눈 앞에 두고 “이제 갔다가 다시 오리라”(요14:28)고 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얼마나 여유 있는 말씀인가? 예수님은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을 확실하게 보고 계셨다. 주님에게 큰 고난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고난이 역전될 것도 알고 계셨다. 믿음이라는 게 무엇일까? 역전승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의 역전승을 믿는다. 예수님의 역전승에 대한 비밀, 그 기쁨, 그 평강 속에서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평강이 나를 주장하는 사람이 되자.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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