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갈수록 인심이 각박하다고 하더니 이제는 각박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극치를 행해 다다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의 환경이 나를 먼저 보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가대로 자기민족을 우선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이건 역사의 흐름이다. 결국 인심도 인정도 배려도 사랑도 사라져 간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가? 성경의 가르침은 항상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열심으로”(에크테네 ‘εκτενη)는 “전심전력을 다하라”는 뜻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잠언서에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10:12)고 말씀한다. 전심전력을 다하여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자기의 실수를 덮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약점을 찍어 내리기를 좋아하지만 덮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일이다. 사랑으로 상대방의 “죄를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고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우고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시고 마음이 너무 아프셨다. 햇빛이 내리쬐면 나뭇잎이 말라 부스러질텐데, 자기들이 만든 임시방편의 옷을 만들어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다.
인간의 의는 마치 나뭇잎으로 만들어 입는 옷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덮는 임시방편의 인간의 의는 부스러져버리는 나뭇잎과 같다. 그래서 손수 짐승의 피를 흘려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 짐승의 가죽은 영원한 하나님의 의를 계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실 것을 미리 계시해 주셨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덮어주셨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할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삶이다. 어차피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한다. 세상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왜? 예수님의 사랑의 희생으로 우릴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기독교에 용서가 없다면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용서하지 못하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거짓말쟁이라고 말씀하신다(요일 4:20)
남편과 아내는 서로 완전하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 아니다. 모자라서 보완하려고 결혼한 것이다.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결혼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아담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시려고 하와를 만들어 돕는 배필이 되게 하셨다. 돕는다는 것은 서로 부족하기 때문에 돕고 덮어주고 살라는 것이다. 사람이 만나서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허물이 보이고 부족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왜 그럴까? 사랑이 식어가기 때문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은 허물을 가려준다. 사랑은 이처럼 눈이 멀어지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눈이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사랑의 눈이 멀어 마치 독생자 예수님을 바라 보시듯이 바라보신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말세지말(末世支末)을 만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서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참고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한다. 혼자서만 예수 잘 믿어서는 안 된다. 온가족이 모두 함께 예수 잘 믿고 서로 돕고 살아가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빵집을 운영하면서 직접 빵을 굽는 주인이 있었다. 그 빵집에는 새벽부터 빵을 사려는 손님들이 늘 줄을 서서 기다렸다. 얼굴에는 항상 평안함이 가득하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마음이 우울하던 사람도 그 빵집에 들르면 금방 마음이 밝아진다고 한다. 그는 빵을 구우면서 늘 “결코 어제와 같은 빵을 굽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하루하루 새로운 모습으로, 어제보다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빵에 새겨 넣고 싶다”는 말이다. 그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은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빵이 구워졌어요. 손님에게 팔기에는 너무 귀한 빵이라서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 빵입니다.”
이 사람이 최고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이 보기에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빵 굽는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아름답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이것이 배려이고 이것이 사랑이 아닌가? 그런 사랑만 각박한 이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과거의 나를 위한 이기심의 삶, 내가 원하는 정욕의 삶을 버리고 새해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라고 하신다.
그리고 말세지말(末世支末)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힘을 다하여 용서하고 덮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갑옷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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