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여름은 코로나 때문에 휴가 다운 휴가는 못해보고 지나간다. 해외는 꿈도 못 꾸고 그저 가까운 해변이나 산에 가서 2, 3일 쉬다 오는 것이 올해를 사는 보통 휴가법이다.
나는 문득 오늘 한국의 우리 어머니 세대들의 휴가를 기억했다. 한국의 남도 어느 촌자락, 시골에서 농사를 짓느라 논으로 밭으로 해뜰녁 부터 해질녁 때까지 일한 어머니들은 휴가를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팔 다리가 너무 아프고 등굽혀 밭을 메느라 허리가 아프다 보면 어쩌다 우리 물 맞으러 갈까하고 누군가가 제안을 한다. 그러면 동네 아줌마들 몇몇은 작당을 해서 (?) 도시락을 싸들고 먼길을 걸어 물 맞으러 갔다.
화순에서 약 30리 길을 걸어가면 이서면 적벽에 약 30미터 되는 폭포가 있었는데 인근 마을 사람들이 그 곳으로 모여들어서 여름이면 등에 물을 맞곤 했다. 여인네들이 그 당시에는 수영복이 없어서 얇은 무명옷을 입고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수 물을 맞으면 등이나 허리가 시원하고 아픈데가 다 나은 것 같은 느낌을 얻었다. 여름에 한 두번 바쁜 날 틈을 내어 아줌마들끼리 어울려 먼길을 걸어 물을 맞고 오는 것이 그나마 그들의 피서겸 치료법이었다.
조금 더 큰 맘을 먹으면 버스를 서너 시간 타고 보성 해수욕장이나 완도 명사십리 해수욕장까지 가서 그 곳에서 모래에 파묻혀 모래찜을 했다. 뜨거운 모래에 구덩이를 파고 누우면 같이 간 다른 사람이 삽 같은 것으로 모래를 덮어서 얼굴만 내밀고 한참을 누워있는 것이다. 농촌에서 일을 하다 보면 온 몸 근육과 관절이 피곤하고 쑤시기 마련인데 바다 물에 몸을 잠간 담갔다가 뜨거운 모래에 오래 누워 있으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확실히 치료효과가 있었다.
모두가 코로나로 힘든 가운데서도 나는 여름 2개월 동안 아침 7시부터 열심히 일해야 했다. 섬머 캠프에 오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이다. 어떤 부모들은 보내기를 꺼려 하는데 믿고 보내는 부모들이 고마워서 나는 더 열심히 가르치고 돌보았다. 이제 8월 둘째 주가 되어 학교가 시작하므로 섬머 캠프가 끝나서 나는 지친 몸을 잠시라도 쉬기 위해 갈베스턴 해변을 찾았다. 그리고 내가 한 것이 무엇일까? 나의 어머니 세대들이 하신 것처럼 페블 비치 뜨거운 모래에 누워 찜질을 하였다. 8월 14일 기온이 94도 였는데 모래가 충분히 뜨거웠다. 목요일 오후 그리고 다음 날 금요일 오전 네 시간을 바다 물에는 잠시 모래 위에서는 오래 뜨거운 태양이 달궈논 모래 위에 누워 있었더니 지난 주부터 등에 생겼던 담이 나아진 느낌이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어머니 최복례 씨와 아줌마들 생각을 했다.
“물 맞으러 갈까!” 그렇게 어느 여름 한 아줌마가 제안을 하면 동네 아줌마들은 “그래!” 하고 화색이 돌았다. 남편들이 일손 바쁘다고 반대해도 ‘자기들은 맨날 술 쳐마시면서..’ 무시하고 이틀을 잡아 해수욕장에 가서 모래 찜질을 하고 오면 일년동안 거뜬히 모심고 밭 가는 농촌의 힘든 일을 해내었다.
삶에 지쳐도 딴 길을 가지 않고 그저 지혜를 모아 ‘우리 물이나 맞으러 가세’ ‘온 몸 삭신이 쑤시는데 여름이 끝나기 전에 우리 다음 달에는 모래찜 하러 가’ 이것이 60,70년대 한국 농촌 어머니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휴가랄 것도 없이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교육시킨 아들 딸들이 발전되고 잘사는 지금의 한국을 이룬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조의석 목사
우드랜드 빛사랑교회 담임목사, 수필가.
저서: 수필집 <블루보넷 향기>(2010), 시집 <거듭남>(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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