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가락들 사이에서 누가 더 중요한지 언쟁이 벌어졌답니다. 엄지가 본인이 제일 으뜸이 되는 손이라고, 검지는 내가 없으면 방향을 가리킬 수도 없다고, 중지는 내가 없으면 제대로 욕을 할 수도 없다고, 약지는 내가 없으면 영원한 선약의 증거를 가지고 다닐 수 없다고, 새끼가 없으면 약속을 할 수 없다고. 서로 자신의 중요성에 관해서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다들 자기들이 잘났다고 난리가 났던거죠.
우리들의 이야기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높은지 따지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말입니다. 어디에나 이런 소리가 있듯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이 있고, 그전에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나의 몸으로서 부분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비유로 이야기해요. 발이 손이 아니라도 몸의 일부이고, 귀가 눈이 아니라도 몸의 일부라는 이야기이죠. 서로 하는 일이 다르다. 그러니 우리에겐 다 필요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해도 만일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지 결정할 수 있다면 어떤 부분을 감당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서 조금만 일해도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비치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생기실 겁니다. 왜냐면 제가 그렇거든요. 축구선수들 중에 공격수가 골도 넣고 이적료도 많이 받고 그러니까 너도나도 공격수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 운동장엔 11명 공격수들끼리 축구 경기를 했던 것 같네요. 이처럼 더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인가 봅니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담당하고 싶은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몸에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팔뚝에 팔꿈치 반대편으로 안에 접히는 부위는 뭐라고 하는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기도 해요. 이 정도는 이름을 검색해 볼 수라도 있겠죠. 하지만 이름이 없는 곳도 있습니다. 가령 광대와 볼의 사이. 손가락을 벌렸을 때만 보이는 연결해주는 살의 이름은 어떻게 검색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몸의 부분들이 각각 역할을 다해주고 있어서 우리 몸이 잘 유지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몸의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몸의 생명이 다하는 날이 되면 그 모든 몸의 부분들도 함께 다 같이 죽을 텐데 말이죠. 몸의 생명이 다하기 전까지 누가 높은지에 대한 끝없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끝에 대하여 알려주듯 우리 몸은 죽음과 아픔이란 부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합니다.
며칠 전 제 친구 하나가 새끼손가락 끝에 살짝 상처가 나서 그 주변에 염증이 생기는, 소위 ‘조갑주의 염’으로 고생했습니다. 그 통증은 어마어마한가 봅니다. 잠을 자다가 부딪혀도 번쩍 깨고, 머리를 감을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약속해줘’라면서 새끼손가락은 사용하지 못했다고 해요.
이처럼 우리의 몸은 아픈 곳에 자동으로 모든 관심이 쏠리고 그 부분을 회복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히 우리 몸의 중심은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는 곳도 아니고, 가장 예쁜 곳도 아니고, 가장 아픈 곳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너도나도 ‘내가 가장 아프다. 나보다 아픈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는 또 다른 경주가 시작되곤 하더라고요. 우리 몸에 가장 아픈 곳은 어디일까요?
제가 믿고 의지하는 이 기독교의 믿음에는 예수를 아는 것이 중심이 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온 세상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해요. 송아지가 소이고 병아리가 닭인 것처럼, 예수도 신(God)인 것이죠. 그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아픈 사람들과 함께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만나고, 세금 걷는 사람들, 창녀들, 술에 절어서 사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그 예수는 소위 말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에 심판되어 그 당시에 가장 고통스럽고 가혹한 사형 방법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우리같은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시다가 우리 같은 죄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능력이 많은 예수는 사망에 내려가셨다가, 그 사망까지도 이기며 다시 부활하신 분이신거죠. 우리가 믿는 예수는 그렇게 철저하게 낮아지고, 무시받고, 조롱받고, 아파했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으면 우리에게도 사망을 이기는 권세를 주십니다. 죄성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는 여전히 생명의 손길을 내밀고 계십니다.
동양에서 주희가 저술한 대학이라는 책에는 팔조목이 있습니다. 사물을 탐구(격물), 앎을 확장(치지), 의지를 성실히(성의), 마음을 바르게(정심), 몸을 닦아(수신), 가정을 가지런히(제가), 나라를 다스려(치국), 천하를 태평하게(평천하)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이 여덟가지 항목들을 돕고 계십니다.
이 조각글이 오늘의 치열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께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혹시 신앙이 궁금하여 함께 대화하고 싶으신 분들은 언제든 연락해주세요. 6피트에 거리를 두고 커피 한잔 사겠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셨듯 그 아픔을 귀 담아 듣겠습니다.
샌안토니오 온누리교회 중고등부 담당 사역자
이현곤 (Martin)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