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현대 세속 사회에서도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여전히 유의미한지를 다룬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기독교인들의 신앙만큼이나 확고하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해도 더 이상 세상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은 차라리 낫다. 현대 사회에서 신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은 듯 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여전히 신은 부인할 수 없는 존재자이며 현대 사회에서 절대적 의미 자체임을 설파한다. 저자에게서 꼭 들어야할 몇 가지만 살펴보자.
- 과연 종교는 사라지고 있는가?
어디에도 신앙의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신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우습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선 자리에서 눈을 조금만 돌려보자. 지난 주일 유럽 전체의 인구보다 더 많은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아는가? 1970년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의 기독교인은 1100만으로 인구의 1.2%였다. 그런데 2020년에는 1억7천만, 인구의 10.5%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1910년 아프리카 기독교인은 1200만으로 인구 9%였다. 2020년에는 6억 3천만으로 인구 49.3%가 될 것이다. 캐나다의 카우프먼은 [종교가 세상을 물려받을 것인가?]에서 단호히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이렇게 말했다. “종교는 매혹과 의미와 정서를 제공하는데 반해 현 시점에서 우리 세속주의자는 줄 것이 없다”(p. 4). 랍비 조너선 색스는 “다가올 21세기는 전 세기보다 더 종교적이 될 것이다”고 했다(p. 45).
기독교가 감소한다는 서구 사회를 좀 더 들여다 보자. 1960년 초만 해도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기적이나 그리스도의 신성, 육체의 부활을 믿는 전통 신앙인들은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실재 나타난 결과는 반대이다. 퇴출될 것이라고 믿었던 보수적 교회들은 여전히 생생하며 도리어 진보적인 교회들이 파리를 날리고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소위 모태 신앙으로 유지되어온 종교 집단은 쇠하여 가지만 개인의 신앙 결단에 기초를 둔 선택 종교, 특히 복음주의 개신교 집단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이다(pp. 42-44). - 삶의 의미에 대하여
삶의 의미를 질문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가 없다면 어찌될까? 그 답은 스스로 만들어야 내야만 하며 삶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조작한 답에 만족할 인간은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것은 자신의 실존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고 한 것은 종치기 소년 답다. 인간은 밥만 아니라 의미도 함께 먹어야 한다. 하바드 의과대학 교수 아툴 가완디의 [Being Mortal] (김희정 역,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소개된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소개한다. 노인 요양시설에 고양이, 앵무새, 토끼, 알 낳는 암탉들을 들여와 돌보게 했다. 틀어 박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지내던 사람들이 활기를 찾아갔고 서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짐승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자극용 의약품 투약이 38%수준으로 떨어졌고 사망률도 15%나 낮아졌다(p. 87). 이유는? 실험을 주도했던 의사는 “인간의 근본 욕구인 삶의 의미 때문이다”고 했다.
고난과 죽음을 대함에 있어서도 신앙은 큰 유익이 있다. 기독교적 관점은 세속주의와 타 종교와 현저히 다르다. 불교에서 고난을 전쟁의 업보이다. 금욕적인 해탈로 초월해야만 할 환영과 같은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그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고난은 하나님을 깊이 알며, 자신의 인격을 심화하는 역할을 한다. 고난의 과정을 믿음으로 통과함으로써 그 분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는다. 고난을 환영하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 유익하며 선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p. 106-107). 빅터 프랭클은 2차 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의사이다. 아침이면 일부 사람들이 불려 나가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해야 했다. 살기를 포기하거나 부역자가 된 이들과 끝까지 자신을 아름답고 고귀한 상태로 지켜낸 사람들의 차이를 탐구했다. 결과 삶의 의미가 두 부류 사이에 있음을 밝혀냈다. 승진이나 사회적 지위, 가정 등 이생의 것들에서 의미를 추구했던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대부분 쓸려 나갔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들은 기준점이 달랐다. 이생을 초월한 기준점으로 삶의 의미를 옮긴 이들이었다. 죽음의 문제도 그렇다. 무신론자 까뮈는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사랑의 관계가 끝이 남으로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진정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이해한다. 어쩌면 현대 사회는 사람들로 죽음과 고난을 맞게 함에는 역사상 최악의 시대일 것이다(p. 108).
리처드 슈웨더는 이런 다름은 우주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성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성경적으로 말했다.
“고대 사람에게…..바깥 세상은 행복하고 즐거웠지만 세상의 속은 심히 슬프고 어두웠다. 소위 즐거운 고대 사회는 표면상으로는 쾌활 했지만 그 이면에 ‘우연과 운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바깥 세상은 어둡고 고난으로 가득하나 그 속에는 오직 순전한 지복과 기쁨뿐이었다”(wow!).
- 낙관이냐 희망이냐?
2016년 4월 뉴욕 타임즈 표지 기사에 의하면 1999년부터 2014년까지 미국의 자살률이 24%증가했으며, 후반 8년의 증가율은 초반 7년의 두 배에 달했다. 10-14세 여자의 경우는 세 배로 높아졌고 모든 인종과 성별에 고르게 나타났다. 경기 침체나 일자리 감소를 원인으로 돌리기에는 큰 허점이 있다. 경제적으로 배제된 흑인 남자의 자살률은 변동이 없었던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하버드 대학 교수 로버트 피트넘이 지적한 “절망”이란 단어다. 지금처럼 풍요를 누리며 살았던 적이 없었건만 이 시대의 지배적 메시지는 어둡다. 어둡다 못해 암울하다. 현대 소설들은 인간의 소외와 절망이 주제이며, 인기 영화들은 세계 종말과 환경재앙, 좀비 등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끊임없이 호흡하게 한다.
인간은 미래 지향적인 존재이다. 희망이 있으면 버틸 힘이 생긴다. 초창기 미국은 기독교에서 미래의 희망을 얻었다. 그들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신뢰했다. 고난도 기쁨만큼이나 의미가 있었고 심지어 죽음도 두렵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계몽주의의 합리성이 대륙의 정신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보다 조국을 지상 최고의 나라로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받들게 했다. 하나님이 ‘신같은 국가’로 대체된 것이다. 이것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현대에 들어 하나님 나라 개념은 한 단계 더 낮아져서 “진보와 이성과 자유의 문명…. 인권 이야기”로 제한되었다.
진보란 근본적으로 경제의 부흥과 발전을 전제한다. 그런데 경제 발전으로 파생된 환경 파괴와 자연 재해, 그 밖에도 유행병, 테러 등이 현대인들을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세계 경제가 한 순간에 붕괴될 수 있음을 보았다. 아직도 젊은 세대들 중에 부모 세대보다 자신들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이가 있을까?
[반지의 제왕] 작가 J. R. 톨킨은 사람들이 뻔한 허구에 불과한 판타지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세속성조차도 파괴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이 인간 아닌 것들과 교류하고, 죽음에서 벗어난 이상 사회를 믿으며, 이별이 없는 영원한 사랑을 갈구한다. 이런 욕구는 죄로 상실해 버린 에덴의 기억이 DNA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능에 잠재된 갈망은 지성에 숨죽여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능력 때문에 우리가 복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했다.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라고, 지난 이 천년 동안 인류의 온갖 지성들이 이 스토리의 숨통을 조였다.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나는 우리는 사실로 믿는다. 엄연한 역사이기에 믿는다.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절망이란 없다. 이는 낙관 정도가 아니다. 진보는 더 더욱 아니다. 죽음 자체도 죽여버리고, 희망 정도는 우습게 넘어서는 부활이다.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swbtsedu@yahoo.com
832-762-7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