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성격을 뛴 마가 복음 설교집이다. 마가 복음의 각 장의 중요 토픽들을 설명한 것이나 책의 각 장들은 독립적인 성격을 갖는다. 목회자 혹은 마가 복음서에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적극 권하는 바이다.
먼저 책의 서론 부에서 신약 성경이 과연 믿을만한 진술들인지를 답한다. 한 때 성경의 내용들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복음서들이 예수님 이후 100년은 지나서야 기록되기 시작했으며 세대를 거치면서 전설적인 요소들이 가미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이 지지를 얻게 되었고 프리드리히 니체나 영국의 작가 조지 엘리엇 등이 영향을 받아 신앙을 잃었다.
다행히 정반대의 주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리처드 보캄의 [Jesus and the Eyewitnesses]는 복음서는 목격자들의 직접적인 증언들의 기록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복음서를 전설로 보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솔직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저주했다. 교회 내에서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의 이같은 수치스런 사건을 적나라하게 들추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베드로 자신 뿐이다(p. 23).
이 복음서가 베드로의 비서이자 통역가인 마가의 작품이라고 인정 받는 것은 주후 130년 경 오늘날 파묵깔래로 알려진 터키의 유명 온천 지대인 히에라볼리의 목회자였던 파피아스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마가 복음에는 베드로가 자주 언급되고 그가 부재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들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가에 따르면, 곧 베드로가 증언에 의거하면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한 마디로 그 분은 역사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이시다. 이전의 인간의 모든 전통이나 시스템, 권위 따위는 그 분 앞에서는 더 이상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그가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숨 가쁘게 움직이는 그 분의 가르침과 사역들, 그 분을 만났던 사람들의 반응을 읽어가면서 우리 각자는 그 분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를 알아가게 되면 우리는 결코 어중간한 지점에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고치시다(막 2:5-8)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다는 소문들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운 상태로 데려온 이들이 있었다. 사람들로 인해 도저히 예수께 접근할 수 없음을 알고 지붕을 뜯어서 병자를 내렸다. 이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다”(막 2:5)고 하셨다.
이 속죄의 선언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죄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기에 오직 신만이 속죄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던 서기관들, 즉 율법 전문가들이 그 점을 놓칠 리 만무했다. 그들은 속으로 “감히 함부로 지껄여 신을 모독하다니!” 마가는 청중들의 반응에 대응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예수님께 하나님의 속성을 돌린다. 하나님만이 ‘멀리서도 인생들의 생각을 통촉’(시 139:2)하실 수 있으신데 예수님이 그러하시다.
(막 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
여기서 오늘날에도 학자들의 논란을 일으키는 대목이 나온다. 예수께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주장하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막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만약 ‘어느 쪽이 쉬울까?’라고 고민을 했다면 이미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를 놓친 것이다. 예수님께는 둘 다 쉽지만 우리에게는 둘 다 어렵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우리에게는 둘 다 전혀 불가능하다. 질문의 의도는 따로 있었다.
(막 2:10, 개정)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즉 예수께서 속죄 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드러낼 목적으로 이 질문을 하신 것이다. -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시다
고대인들에게 신이란 주로 분노와 정의, 형벌과 심판 등을 인간계에 펼쳐 놓는 존재들이다. 인간을 사랑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주었다는 신은 없다(p. 217).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과정은 스스로 감탄하실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인간이 범죄하여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자 친히 사람이 되어 가까이 찾아오셨다. 자신의 몸에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 절절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를 잘 알 것이다. 인자한 스승 덤블도어가 해리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다. 사랑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고아로 성장한 볼드모트는 마법의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7월의 마지막 날에 태어난 아이, 곧 해리 포터가 자신을 꺾을 것이라는 예언을 알고 한 살 된 해리를 죽이려고 한다. 볼드모트는 부모를 죽이고 이젠 해리에게도 죽음의 마법을 건다. 그런데 왠걸 마법이 반사가 되어 그 악당이 도리어 해를 입게 된다. 그는 육체를 잃고 말았다. 훗날 해리는 덤블도어에게 묻는다. “그가 왜 저를 만지지 못하는거지요?”그러자 덤블도어가 말한다. “네 어머니가 너를 살리기 위해 죽었단다. … 네 어머니의 사랑처럼 강한 사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지. 상처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표시란다. …깊은 사랑을 받으면 …영원한 보호막이 생긴단다”(p. 216).
우리가 덤블도어가 해리의 모친이 보여준 사랑에 감동한다. 그것은 인간은 참 사랑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즉 창조주의 사랑에 대해서 합당한 반응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우리들 안에 내장된 셈이다.
그 사랑이 드디어 육체를 입고 나타났다.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던 것이다. - 왜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마지막 순간을 아무 두려움 없이 맞이했던 인물들이 역사상 많이 있다. 순교사를 조금만 안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름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555년 옥스포드에서 니콜라스 리들리와 휴 래티머가 나란히 묶여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 개신교인 성공회 소속의 초대 성직자들로 메리 1세가 국교를 카톨릭으로 회귀시키려고 할 때 그들은 거부했다. 발 아래에서부터 불꽃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래티머가 말했다. “니콜라스 주교님. 남자답게 당당하게 죽읍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 엄청난 불을 일으킬 것이오. 이 불길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오!” 이 얼마나 담대한 죽음인가! 그런데 정작 신앙의 주인공 되신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고 공포에 사로잡히셨다니 어찌된 일인가? 게다가 사흘만 부활하실 것도 아셨음에도 말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순교자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고통과는 다른 어떤 끔찍한 것을 경험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중,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라고 했다. 잔은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뜻한다(겔 23:32-34; 사 51:22).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일체 분리됨이 없으셨고 완벽한 사랑 안에서 계셨다. 반면 죄란 하나님과 영원한 끊어짐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 빛과 생명, 사랑, 은혜 온갖 좋은 것에서부터 단절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지셨다. ‘슬퍼하사’(마 26:37)는 ‘공포에 사로 잡히다’는 뜻이다. 육체의 죽음이 아닌 하나님과 분리됨이 공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주님의 그 공포와 두려움이 우리에게는 복음이다. 그의 분리되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유일한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묻고 싶다. 그대는 이 길 위에 서 계신가?
박영호 목사
선한목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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