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민 왔을 때, LA 동부에 위치한 웨스트코비나 연합감리교회(박준성목사시무)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해마다 한 번씩 ‘이동교회’ 라는 것이 있었는데 연휴가 끼어 있는 주일을 택해서 전 교인이 2박 3일 일정으로 다녀오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해엔 맘모스 레이크(Mammoth Lake, CA)에서 모이게 되었는데 현장에 도착한 그날 밤 프로그램은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백두산보다 높은( 9,868 피트 , 백두산은 9,000 피트 ) 깊은 산속에 피워 놓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 앉은 우리 모두는 기타반주에 맞춰 추억에 깃든 노래들을 부르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몇 명의 청년들이 내 주변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청년회장이 “목사님, 지난밤에 목사님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나타난 목사님은 가짜 목사님이시든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주변엔 가벼운 웃음이 일었지만 나는 좀 불편했습니다. “ 내가 얼마나 좋았으면 당신 꿈에까지 나타나누? ”하고 그 분위기를 웃어 넘겼지만 그 일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청년회장의 ‘ 가짜 목사 ’ 라는 말이 내 귀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함으로써 나와의 부담 없는 관계를 과시했겠지만 나로서는 가짜 목사라는 그 말이 큰 부담이 되어 지금까지 내 마음에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기독교대한감리회 삼남연회에서 정식으로 안수 받은 목사입니다. 미국으로 이민 온 후 미연합감리교회(UMC)인 사우스캐롤라이나 연회(South Carolina Annual Conference)에서 정회원이 되어 그로부터 UMC에서 30년 목회하고 지난 2016년 남가주-태평양연회(California-Pacific Annual Conference)에서 은퇴하고 지금은 텍사스연회(Texas Annual Conference) 감독의 파송을 받아 Southeast District에 소속된 버몬트연합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입니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참말입니다. 진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세계에서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진짜 목사가 되었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 진짜 목사’ 로 인정해 주실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가끔 어느 모임에서든 혹은 어떤 글에서 ‘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 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나보고 말하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할 때도 있었습니다.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의 ‘ 기준’ 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자신이 바로 그런 목사가 아닌지 늘 마음 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목사가 되었기에 하나님 앞에서만은 진짜 목사가 되기 위해 남 다른 방법으로 목회에 임했던 지난 날들을 돌아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평가합니다. 교회를 예로든다면, 사람이 많이 모이면 큰 교회이고 적게 모이면 작은 교회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부자라 하고 돈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자신의 공적(功績)을 드러내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7:22-23) 이들의 삶이 얼마나 화려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누가 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지만 영 (靈)의 세계에 들어가면 누가 크고 작은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라고 했는데 우리 가운데 섞여 사는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무슨 수로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 고린도후서6:8-10 )
세례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요1:6)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응당히 있을 것 같은 ‘기사와 이적’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예수님)을 가리켜 말 한 것은 다 참(眞)’이라 했고(요10:41)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평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눅7:28)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절대군주(絶對君主)였던 헤롯왕이 자기의 동생인 빌립의 아내(헤로디아)를 취하여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므로 세상을 벌컥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헤롯의 이 옳지 않은 행위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으나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거침 없이 직격탄을 날립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일로 그는 옥에 갇히게 되었고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지만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헤로디아로부터 요한을 보호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창녀와 같은 이런 계집들의 놀음에 결국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지만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보았기에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괴로워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달게 들었다고 했습니다.(막6:17-29)
세례요한은 사람들 앞에서 크고 굉장한 일을 이루지 못했으나 헤롯왕도 그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길 정도로 그의 말과 행동은 참되고 신실했던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게 모두 이렇게 왔다가 가는 것인데 이 땅의 삶이 짧으면 어떻고 또 길면 어떻습니까?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가짜 목사라하면 또 어떻습니까?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볼품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양’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삶이 참(眞)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유양진목사
버몬트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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