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자기를 신뢰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보다 더 큰 격려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으로부터 ‘신뢰’ 받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목회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어진 결론입니다. 평소에 신뢰를 주지 않았는데 왜 나를 신뢰(믿지)하지 않느냐면서 언성을 높인다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칼럼은 나를 칭찬하고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의 소지가 없잖아 있으나 ‘신뢰’에 관한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이 글을 씁니다.
- 싼타 바바라(CA)에서 목회할 때 충청도 어느 대학 영문학교수가 UCSB에 교환교수 차 오게 되었는데 부산에 있는 ‘문교수’로부터 소개 받았다면서 전화를 주었습니다. 2년 정도 싼타 바바라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동안 거처할 집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과 함께 싼타 바바라에 오면 우리교회에 출석하겠다는 연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먼저 인터넷을 통해 자기들이 살 집을 찾아보고 그 집을 알아봐 달라며 주소까지 보내었는데 주소대로 찾아가 보았더니 한국의 ‘대학교수’ 가족이 살기에는 적당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도심에서 외곽졌을 뿐 아니라 너무 낡았고 또 그 집이 위치한 동네도 그렇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교수께서 살만한 집이 아니라고 설명했더니 나에게 집 구하는 걸 일임했습니다. 그 교수가 알아본 렌트비는 월 800불이었습니다.(25년 전) 그래서 학교근처에 제대로 된 아파트가 있었는데 1,100불이었습니다. 800불 짜리 집과는 모든 것이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파트를 계약해 놓았습니다.
이들은 정한 날짜에 도착했고 계약해 놓은 아파트에서 짐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의 표정은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수고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시큰둥해졌으니 민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난 후 위에서 말한 부산에 있는 ‘문교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문교수 가족은 싼타 바바라에서 교환교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신 분이었는데 그는 인품이 참으로 훌륭했고 우리와 같이 있는 동안 개척교회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었습니다. 오랜만의 전화였으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문교수의 전화는, 지금 말하고 있는 이 교수한테서 며칠 전 전화를 받았는데 인터넷 보고 찾은 집이 800불인데 왜 유목사는 1,100불 짜리 아파트를 구했는지 혹시 이 과정에서 유목사가 중간에 뭘 좀 챙긴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 전화했다는 것입니다. 전화받은 문교수가 웃으면서 “유목사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 말을 했다면서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전화했던 것입니다. 문교수는 그의 전화를 받고 나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난 다음 그 교수에게 ‘유목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게 아니라 나에게 확인하기 전에 자신이 직접 경험한 유목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즉, 문교수는 나를 신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수가 의심하는 것처럼 아파트를 찾아 주면서 무슨 돈을 챙깁니까? - 감리교 목사가 감독의 파송 없이 임의대로 콜럼비아(SC)에서 싼타 바바라(CA)로 교회를 옮기는 바람에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원로목사가 세운 교회에 부임한 지 8개월 만에 그 교회를 사임하고 길바닥에 나 앉았습니다. 그 교회는 아직 연합감리교회 공식인정(Chartered)이 나지 않은 선교교회(Mission Church)였습니다. 감독의 파송절차 없이 임의대로 교회를 옮겼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행정적으로 도움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내가 사표 낸 그 교회는 한국감리교회(Korean Methodist Church-KMC)로 교단을 옮기고 P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셔왔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UMC) 이름으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KMC로 파송된 P목사가 그가 소속된 지방회 모임에서 나를 성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목사로 인해 우리가 입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했습니다. 유목사가 우리교인들의 집을 개인적으로 심방하고 편지를 보내고 전화하는 바람에 목회에 적지 않은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고 말할 때 마침 그 자리에는 어거스타(GA)에서 목회했던 L목사님이 있었는데 그는 어거스타 KMC에서, 나는 콜럼비아 UMC에서 목회할 때 자주 만난 친구목사였는데 지금은 우리 둘 다 캘리포니아에 와서 그는 LA에서 나는 싼타 바바라에서 목회를 하다가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P목사가 목회윤리에 어긋나는 유목사의 행위로 피해를 입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L목사가 그 자리에서 “유목사님은 당신이 말하는 대로 그렇게 지저분한 목사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L목사님도, 내가 목회했던 그 교회 교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편지를 보내고 전화한 사실이 있는지 없는지 나에게 확인하고 난 다음 유목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봐온 유목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L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나는 그 교회 교인들을 개별적으로 심방한다든가 전화하고 편지보내는 그런 한심한 짓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부산의 문교수님이나 L목사님이 나에게 보낸 무한한 신뢰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던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에 대한 이런 신뢰를 갖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기쁨으로, 그리고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빌레몬서’는 사도바울의 옥중서신 중의 하나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의 사적(私的)인 편지로 유일합니다. 빌레몬은 바울과는 믿음의 동지로 친분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바울은 빌레몬을 끝 없이 신뢰했고 빌레몬 역시 바울을 신뢰하는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들 사이에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등장하게 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그는 주인인 빌레몬의 집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가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면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말할 때 ‘갇힌 중에 낳은 믿음의 아들’이라 표현하면서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네시모가 노예의 신분으로 주인의 집에서 도망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는 형벌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자(重罪者)였으나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선처해 달라는 편지를 오네시모의 손에 쥐어 주고 그를 빌레몬에게로 돌려 보냈는데 빌레몬은 바울이 자신을 신뢰하고 보낸 오네시모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신뢰한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보여준 내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도망자였던 오네시모는 후일에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고 네로 황제의 대박해 당시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한 바울의 서신을 여기 옮겨 적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自意)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빌레몬서 1:8-21)
유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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