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역사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 경쟁의 도가 더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기업마다의 경쟁은 당연하겠지만, 이젠 교회마저도 기업논리 위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작은 교회는 없애고 교회를 대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야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데 그 ‘무슨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병든 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 크기와는 상관없이 우주적인 교회로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지역의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는 그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특정한 교회가 아니라 각자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크기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쟁사회이다 보니 교회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 새로운 교회가 들어서면 기존 교회들이 돕고 새로 시작한 교회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져야할 교회가 세상적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결국 교회마저 끝 없는 경쟁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고 극작가이며 소설가였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기수였습니다. 그는 박애 주의자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조카이기도 하고, 또한 그는 당대 손꼽히는 지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여류 소설가이며 수필가인 시몬느 드 보봐르와 계약 결혼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통적인 지옥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이해되어진 지옥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돈과 자원 등,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것을 공유해야만 하기에 타인이 지옥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르트르가 말한 지옥을 맛보고 있습니다. 저 사람보다 더 많은 돈과 자원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온갖 추악한 일이 벌어지고 사람을 죽이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지금 전 세계를 덮치고 있는 경기침체와 국가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 치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가 존재하는 한 중단 됨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벧엘(Bethel)과 아이(Ai) 사이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에게 가축이 많아지자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땅이 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과 목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두 집안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그치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살고 있었으니 서로 동거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전격적인 제의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 한 핏줄인데 아랫사람들이 서로 다툼으로 우애가 상해서 되겠느냐. 봐라 네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우리 서로 떨어져 살자. 네가 먼저 원하는 땅을 택하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창13:1-13)
이때 롯은 나이 많은 삼촌을 물리치고 우선 보기에 좋은 기름진 곳을 택하게 됩니다.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물욕에 눈이 어두웠고 영의 눈이 아니라 육의 눈으로 보았던 그 기름진 땅은 결국 자신을 망하게 했던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이해하고 양보하고 인내하는 마음은 큰 축복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날과 같은 이러한 시대에 이해하고, 양보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삶은 어리석게 보이고 손해보는 것 같이 보이겠지만 그러나 이 같은 삶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가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엔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을 중심으로 수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곤 하는데 물이 동(動)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다 낫게 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도 은연중 심각한 경쟁이 펼쳐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38년 동안 경쟁 사회에서 뒤처진 인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자기가 깔아 놓은 돗자리 위에서 벗어나 보지 못한 인생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물이 동할 때 자기 앞서 연못에 뛰어드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없이 서러워하는, 그리고 그 환경에 깊이 동화(同化)되어 철저히 낙오된 삶을 사는 서글픈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돗자리 위에서 뒤척이는 이런 삶이 매우 익숙해져 있었고, 그 돗자리 삶에 깊이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동화되는 삶은 우리도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지독한 냄새도 시간이 좀 지나면 그 냄새에 금방 동화되어 감각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주변 환경에 깊이 동화되어 돗자리 위에서 뒤척이고 있는 이 사람에게 찾아 오셔서 “낫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을 보면 이 사람은 ‘낫는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이 환경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낫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원했던 것은 내 병이 낫는 것보다 물이 동할 때 병의 치유와는 상관없이 남들보다 먼저 연못속에 들어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병은 어차피 나을 게 아니니까… 이런 상황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탓인지 예수님과의 대화는 동문서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네가 낫고 싶으냐?”고 물으셨을 때 이 환자는 “주님,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자 그는 곧 병이 나아 그가 깔고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갔던 것입니다.(요5:1-9) 마치 정상적인 대화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완전히 동문서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전인적인 회복을 말씀하고 있었는데 이 환자는 병이 낫는다는 생각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처럼 엉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환자의 대화를 보면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만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 즉 하늘나라에 대한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땅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늘의 것을 말한다는 것은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38년 동안 돗자리 위에서 뒹굴던 이 환자를 경쟁사회에서 뒤처진 인생으로 여기고 있지만 이 시대의 진정한 낙오자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실패한 자가 아니라 돗자리 위에 버려진 자들일 것입니다. 이 땅 어느 길 한 모퉁이에서 가게와 비즈니스라는 돗자리를 깔아 놓고 그 속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진정한 낙오자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깔고 누운 그 돗자리가 얼마나 크냐? 그게 얼마짜리냐? 몇 스퀘어피트냐? 방이 몇 개냐? 그 크기와 값에 따라 만족하며 그 위에서 한 발자욱도 벗어나지 못하고 뒹굴고 있습니다. 그 크기에 따라 우월감, 혹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38년 동안 깔아 놓은 그 돗자리는 자기만의 세계였습니다. 그 속에 철저히 갇혀서 38년 동안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깔아 놓은 그 제한된 돗자리에 위에 드러누워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신이 정리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인생관이 있습니다. 국가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독특한 자기만의 신앙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에 의해 판단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어느 지역에서 목회할 때 1년에 한두 번 교회나오는 젊은 교인이 있었는데 그는 알콜중독자였습니다. 하루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한 그가 나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목사님, 목회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들도 교회운영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목회하는 방법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날 그 교인으로부터 충고(?)를 듣고 난 다음부터 교인들의 그 어떠한 불만과 불평에 대해 무조건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38년 동안 깔아 놓은 돗자리 위에서 뒤척이고 있는 환자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낫고 싶으냐?’고 물으신 것은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가?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고 싶은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의 축복은 그의 병이 나았다는 그런 저급한 차원의 축복이 아니라, 이 사람은 오늘부터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변화의 주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생존경쟁’이란 엄연한 현실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주변상황에 깊이 동화되어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낫고 싶으냐?’고 속삭이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깔아 뭉갰던 돗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2019년 남은 이 한 달을 잘 정리해서 2020년 새해부터는 이제까지 부모로써, 남편(아내)로써, 자녀로써,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써 ‘살아보지 못한 삶’을 누려봄이 어떻겠습니까?
유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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