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합니다만, 그때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 중에 복싱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가 우리 앞에서 폼을 잡고 몸을 상하좌우로 흔들며 이상한 소리와 함께 주먹을 뻗는데 매우 경쾌했고 정말 멋있게 보였습니다. 만약 저렇게 복싱하듯 싸움을 한다면 굉장히 멋있겠다 싶어 은근히 그 친구를 따라 도장에 가보았습니다. 10여 명의 아이들이 훈련 중이이었는데 여기저기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땀을 흘리며 스텝을 밟는 아이들, 어떤 아이는 줄넘기로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가방을 내려놓고 운동복을 갈아 입고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유심히 그를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를 따라 복싱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거의 한 시간을 연습하는 것으로 기억되어지는데 학교에서 보여주듯 뭔가 빠른 스텝과 나를 현혹케 하는 그런 현란한 몸동작이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거의 한 시간 동안 스탭을 밟으며 원, 원, 원투… 이렇게 손을 뻗는 게 전부였습니다. 한 시간 동안 반복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싱겁기 짝이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는 ‘복싱에서 제일 중요한 게 기초’라면서 3개월 째 이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세계를 모르기도 했지만 싸울 때 멋이 없으면 어떠랴 싶어 그 후로 두번 다시 복싱도장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복싱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박종팔 선수가 출연하는 유투브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영재(英才)발굴단’에 소속된 초등학교 챔피언과 그의 라이벌이 할아버지뻘 되는 대선배를 찾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들이 박종팔 선수의 캠프를 방문해서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특별교육 받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손자뻘 되는 후배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숙인 모습은 세계 챔피언으로서의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세계 챔피언이 손자뻘 되는 초등부 챔피언에게 “너는 이제 초보자가 아니다. 초등부에선 챔피언이다. 모두 너를 우러러 본다. 그렇다면 이젠 몸의 균형과 함께 폼도 제대로 잡혀야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네가 하는 복싱이 얼마나 멋이 있을까? 복싱은 멋이 있어야 한다.” 이제 복싱을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멋있는 복싱’을 강조하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실력이 없는 상태에서 멋을 부렸다간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겠지만 강한 펀치력에 균형이 잡혀 있고 거기에다 멋이 더해진다면 이보다 더한 멋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복싱을 시작하는 어린 챔피언에게 ‘멋’을 강조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이었던 John F. Kennedy는 형제들에 비해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리포트를 제출했는데 ‘A’ 학점을 받았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아버지에게 이 성적표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케네디가 보낸 성적표를 받아보고 짧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넌 원래부터 멋있는 놈이야!’ 케네디는 아버지의 답장을 받은 그날로부터 멋있게 살았습니다. 말하는 것도 멋있게 했습니다. 옷입는 것은 물론, 걷는 걸음걸이도 멋있게 걸었습니다. 그는 일상생활에 멋을 더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비록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멋있게 살다간 사람이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의 ‘목사로서의 삶’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나와 연관된 내용이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는 모름지기 멋이 있어야 합니다. 멋은 인물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인물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인물이 출중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겠지만 목사는 아무리 못생겼다 하더라도 모든 면에 멋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유양진씨처럼!” 관심을 두고 강의를 듣고 있다가 생뚱맞게 내 이름이 올랐을 때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잠시 멍하게 있다가 “교수님, 지금 교수님의 말씀은 제가 못생겼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교수님이 보시기에 제가 정말 못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때 교수님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아, 그거 아직 몰랐습니까?” 그 순간 강의실은 폭소가 터졌는데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자신을 알아야 하지만 못난사람을 보고 못났다고 하는데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보고 못났다고 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지적에 대해 기절할 수 없었던 것은 나를 ‘멋있는 사람’으로 바로 보았기(평가했기) 때문에 그 교수님을 용서하고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지난 1월 마지막 주일 휴스턴한인장로교회(김정호목사)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헌금시간에 아내가 치는 피아노 반주에 기타 치면서 찬양했는데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친 것 같아 마음에 기쁨이 더했습니다. 그날 멕시코 선교사님의 아드님이 참석했는데 예배 후 “목사님, 노래도 참 잘하시고 기타도 잘 치시고… 목사님, 참 멋이 있으세요!” 내가 멋있다는 걸 이 친구가 어떻게 알았을까? 유목사가 멋있는 목사라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사람들이 그렇게도 사람 볼 줄 모르나 했는데 이 친구는 내가 멋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멋’은 인물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목사는 인물과는 상관 없이 멋이 있어야 한다는 그 교수님의 말씀에 기꺼이 동의합니다.
이 ‘멋’은 목사뿐만 아니라 장로는 장로서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멋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때리는 복싱과 같은 격투기에도 멋이 있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야 오죽하겠습니까? 멋은 자신의 삶과 신분에 대한 책임이 동반될 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멋있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간적인 삶에 대해 깊이 동경하며 살았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멋있는 삶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해 준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 온 예수님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예수님의 모습은 이미 교리화된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것 승리하시고 왕의 위엄과 권위를 가지시고 그 앞에 온 인류의 무릎을 꿇게 하시고 찬양과 기도와 존경과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근엄하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잊고 있었습니다. 사나이답게 호탕하게 웃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소박한 눈 웃음으로 거칠고 뻣뻣했던 베드로와 나다나엘,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셨던 그 예수님! 정서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고 항상 노래를 즐겨 부르신 예수님!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는 사람들이 이때껏 맛보지 못한 최상급의 포도주를 몸소 빚어 주셨던 예수님! 교만과 가식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욕과 저주를 거침없이 퍼 부으셨던 예수님!
소위 가진자들과 배운자들로 부터 무시당하고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무식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을 가까이 하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시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부르시며 그들이 추는 춤을 추셨던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살아보려고 하나님을 향해 통사정 하셨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 가는 동안 멋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는데 스데반은 사람들이 궁금했던 ‘천사의 얼굴’이 어떠한 것이지 보여 준 사람이었습니다.(행6:15) 그는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과는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행7:60) ‘저들이 돌을 던지게 한 잘 못이 내게 있으니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처럼 멋있는 삶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스데반과 같이 멋있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유양진목사
버몬트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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