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회에서 우여곡절 끝에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느 책임있는 교인이 찾아와서 ‘다음에 우리가 모실 목사는 은혜가 있는 강한 목사보다 비록 은혜는 없지만 부드러운 목사를 원한다’는 교인들의 분위기를 전해주었습니다. 나에겐 이 말이 ‘유목사는 은혜는 있지만 강한 목사’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난 다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정말 ‘강한 목사인가?’ 나는 그 교회에서 무슨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는데 아니, 없었다기 보다 그런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인 표현일 텐데 그들이 나를 강한 목사로 보았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생긴게 그래서 그랬나? 아마도 부임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교회에 부임한지 두 번째 주일이 지난 후 ‘목회협조위원장’과 ‘평신도 대표’가 찾아와서 “우리는 목사님 다음에 모실 목사님을 찾아야 할 책임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뉴욕에 있는 부목사를 청빙하여 이번 7월 마지막 금요저녁 찬양집회와 토요새벽기도, 그리고 주일 낮 1,2부 예배를 맡긴 다음 평가하여 목사님 후임으로 결정하려고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만약 강단에 세우는 걸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면 할 수 없지요.”
“장로님, 나는 아직 이 교회건물의 구조조차 파악하지 못해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로 나오는지도 잘 모릅니다. 부임한지 이제 두 주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나의 후임자를 선보기 위해 뉴욕에 있는 부목사를 불러 금요찬양집회와 토요새벽기도, 그리고 1,2부 주일예배 강단을 그 부목사에게 내어주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 문제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내 귀에 들리는 말은 ‘야! 이번에 오신 목사님은 NO 할 줄 아는 목사가 왔다’면서 유목사를 환영하는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지만 결국 이 일의 시작으로 불명예스럽게 그 교회를 떠나고 말았지만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후 개인적으로 ‘은혜가 있는 강한목사’와 ‘은혜가 없는 부드러운 목사’ 중 어느 목사를 더 선호하는지 교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의 질문에 대한 교인들의 대답은 ‘은혜는 없지만 부드러운 목사’를 더 선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강한 목사를 거부하는 그 ‘강하다’의 의미는 교인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목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일반교인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은혜가 있는 강한 목사’를 선호했으나 장로들을 비롯해서 리더급에 있는 교인들은 ‘비록 은혜는 없더라도 부드러운 목사’를 더 선호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을 목회하는 동안 나름대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절대다수의 교인들은 ‘은혜로운 예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 회중들의 은혜롭고 우렁찬 찬양, 잘 연습되고 잘 다듬어진 성가대의 은혜로운 찬양 등등등, 이들에겐 ‘교회의 운영’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관심은 ‘은혜로운 예배’가 전부였습니다. 이들은 오늘과 같은 은혜로운 예배를 다음 주일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 세미나 참석을 위해 일주일간 서울에 머문적이 있었습니다. 주일 날 청량리 지역에 있는 어느 교회에 들렸는데 어느 교단인지, 교회이름이 무엇인지, 목사님의 성함이 무엇인지, 무슨 설교를 했는지, 무슨 찬송을 불렀는지 지금은 기억되는 게 없지만 그날의 예배분위기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500명 안팎으로 모인 것으로 보여졌고 교인들이 앉는 의자는 장의자였고 교회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었고 그날 설교는 아주 특이한 내용이었던 것으로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후 결단 찬송을 부를 때 수백명이 마루바닥에 발을 굴리며 박자에 맞춰 찬송을 부르는 그 분위기에 압도당했을 뿐 아니라 예배 마친 후 교인들의 표정을 보았을 때 이게 바로 은혜받은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엔 오늘도 충만한 은혜를 받았고 다음 주일에도 이와 같은 은혜를 또 받게 될 것이란 기대감을 가지고 교회를 나서는 그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현역으로 목회할 땐 청량리 교회가 기억나지 않다가 은퇴하고 난 후 이곳 휴스턴에 와서야 수십 년 전의 그 청량리교회의 예배 분위기가 생각났고 이제 다시 목회를 시작했으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청량리교회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은혜로운 예배를 위해 애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절대다수의 교인들과는 달리 장로들을 비롯해서 리더급에 있는 교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또한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평신도와는 달리 이들은 ‘예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에 의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별의별 희한한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적 가치관’과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 악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시장바닥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과 같은 그런 분위기를 잊지 못합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세(勢)를 규합하기 위해 ‘은혜로운 예배’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를 불리는 그 이유가 신앙적이고 상식적일 때 그들의 활동을 막는 목사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마 목사는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들의 99%는 ‘자기들의 방식대로’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회할 때 정말로 나를 힘들게 했던 교인이 우리와 헤어진지 10년 쯤 지났을 때 내가 목회하는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 후 그와 함께 한 자리에서 “그때, 나 한테 왜 그리했느냐?”고 궁금해서 물었더니 “우리 취향에 맞는 목사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했다”는 말을 듣고 거의 졸도할 뻔 했습니다.
서두에 말한 그 교회는 ‘엘리트’들이 모이는 교회로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하루는 한국의 유명대학 출신 교인으로부터 장편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들을 보고 한 가지 크게 깨달았던 것은 학력과 인격, 그리고 학력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 사람에 의해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메일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경상도 억양의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목사님은 서울 말씨를 녹음해서 수십 번, 수백 번, 혹은 수천 번 연습을 반복해서 서울말을 익혀 설교하십시오’ 이 메일을 받고 나 자신이 보인 반응은 ‘이런 빌어먹을, 엘리트는 무슨 얼어죽을…’
이 시대는 교파의 개념이 무너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출신교파에 의해 교회를 출석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성향(性向)이나 취향(趣向)에 맞는 교회를 찾아 출석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있는 강한 목사나 혹은 은혜는 없지만 부드러운 목사를 찾아 나서는 거야 말릴 수 없지만 그러나 ‘교회’는 구속함 받은 자들이 모여 구속하신 주(主)를 찬양하기 위해 모이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삶에 지친 영혼들이 주일을 맞아 교회에 나왔다면 목사는 당연히 그들을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야 할 무한한 책임감을 갖는 게 옳을 것입니다. 은혜가운데 세워지는 교회는 그 존재만으로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교회를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교인들게게 권면하는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1-5)
유양진목사
버몬트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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