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저지인(吮疽之仁)은 ‘병사를 아끼는 장수의 어진 마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에게 신뢰를 얻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행을 베푸는 행위’에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周)나라의 오기(吳起) 장수(將帥)가 자기 부하의 종기(腫氣)를 빨아서 고쳤다는 소식을 들은 병사의 어머니는 통곡했습니다. 그 연유를 묻는 이들에게 “오기장군께서 내 남편의 고름도 빨아주셨습니다. 남편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 장군을 위해 기꺼이 죽어 주었는데 이젠 내 아들도 장군을 위해 죽을 것”이라며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이를 두고 ‘오기는 병사의 병세가 나아야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 고름을 빤 것뿐 결코 어진 행동이 아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비자에 의하면 오기장군은 부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하의 고름 빠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K목사는 천막교회를 시작으로 소위 대형교회에 대한 꿈을 이룬 목사입니다.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할 때 한강 변에 패여진 웅덩이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는 걸인을 들쳐업고 왔는데 그 걸인의 몸엔 종기가 여러 군데 나 있었고 구더기가 끓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때 일을 이렇게 설교하는 걸 들어보았습니다. “난 그 종기를 모두 입으로 빨아주었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대형교회를 이루었으나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하는 문제와 교회재산 문제로 한국교회 전체를 곤혹스럽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K목사의 행위는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교인을 아끼는 마음? 아니면 자신의 의지와 신념? 열정? 혹은 대형교회에 대한 야망? 어쨌던 그는 이루어야 할 목적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구더기 끓는 종기 쯤이야 문제될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얻은 ‘열매’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저 나무가 못된 나무인지 좋은 나무인지는 그 열매를 보아 안다’고 하셨는데(눅6:43-45) 그의 목회말년의 결과는 여러 가지 추문에 의해 일반법정에서 징역형 판결을 받았으나 고령(高齡)이라는 점이 참작되어 법정구속은 피하였는데 이런 결과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로버트 슈네이즈(Robert Schnase)목사는 ‘목회와 야망-Ambition in Ministry’ 이란 책에서 ‘목회자에게도 야망이 필요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나에게 은근히 말하기를 목회에 성공(?)하려면 어떤 목사의 예를 들면서 ‘교인들의 발가락이라도 빨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물론 그 말의 뜻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교인들의 발가락을 빨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인을 아끼는 마음입니까? 사명입니까? 부흥에 대한 열정입니까? 아니면 목회에 대한 야망입니까?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신앙생활하는 교인들을 목사라면 저들의 비신앙적인 자세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질책하고 꾸짖고 징계할 수 있는 단호함이 있어야 할 텐데 그 교인이 떠날까봐 혹은 교인 수가 줄어들까봐 목사가 상식적이지 못한 저자세를 취한다면 자신이 꿈꾸는 교회를 이룰는지는 모르나 그 결과가 어떨지 궁금합니다. 나는 평생 목회하면서,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를 이루지 못한 것은 대형교회를 위해 K목사처럼 교인들의 종기를 빨아주거나 혹은 어느 교인이 말한 것처럼 교인들의 발가락을 빨아주지 못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에겐 대형교회에 대한 꿈과 야망이 없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민와서 목회할 교회가 없을 때 나성산 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새문안교회를 잠시 담임하셨던 황인기목사님이 기도원에 올라오셨는데 젊은 목사가 장기금식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안타까웠는지 “유목사님, 40일 금식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 목사님도 세계제일의 교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물으실 때 “아닙니다. 저에겐 그런 꿈은 없습니다. 그냥 금식기도하고 싶어서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금식 후 몸이 회복되었을 때 황목사님의 초대로 미국에서 첫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생이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어느 대학에 교환교수 일정으로 도착했는데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도착한 날이 금요일이었습니다. 도착한 그 다음 날 현대 소나타를 구입했는데 차는 월요일에 픽업하기로 했습니다. 이 친구는 미국에서 맞이하는 첫 주일 미사를 성당에서 드리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는 오렌지 카운티에 마련된 아파트에서 기거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인근 지역에 있는 성당을 찾아 전화를 했습니다.
친구인 대학교수가 한국에서 교환교수차 왔는데 구입한 차가 월요일에야 나온다는데 내일 미국에서 갖는 첫 미사를 그곳 성당에서 드리기를 원하고 또 앞으로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 성당에 출석하게 될 텐데 내일 이 친구를 픽업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전화 드렸더니 전화 받으시는 수녀님께서 “월요일에 차가 나온다고 하셨으니까 다음 주일부터 그 차로 직접 성당에 나오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락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인들을 픽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인들을 픽업하지 않습니다’ 그 수녀께서 하신 이 말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합니다. 우리교회 교인이 된다면 거리를 상관하지 않고 픽업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인데 우리의 정서와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고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왜 우리는 심지어 3, 40마일 떨어진 곳에까지 가서 교인들을 픽업해야 되는지 적지 않은 회의(懷疑)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수녀님의 ‘우리는 교인들을 픽업하지 않습니다!’ 이 한 마디는 문화적인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 오늘의 이민교회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민교회에서는 교인들을 픽업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일 날 차 없는 교인들을 교회로 모시고 오기 위해 규모가 큰 교회는 차량유지비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차를 타고 오시는 분들의 형편은 매우 다양할 것입니다. 꼭 필요에 의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남편이 있고 자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인 중에서, 혹은 교회 차로 그들을 모시고 옵니다. 자신을 픽업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회를 옮기는 비정함도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인을 픽업해야 하는 교인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면 그보다 더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구목사가 목회하는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도심외곽에서 사시는 분들이라 주일이 되면 몇 명의 교인들은 차가 없는 교인들을 위해 책임지고 픽업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A교인은 집에서 교회까지의 거리가 20여 마일이 되는데 그가 픽업해야할 B교인의 집은 교회가는 길에 있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4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A는 B를 픽업하기 위해 매 주일마다 왕복 120마일을 운전해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A라는 교인은 B라는 교인을 픽업하는 것에 대해 매 주마다 마음에 큰 부담을 갖고 피곤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B라는 교인은 남편이 있고 결혼한 아들 내외도 있었습니다. 결국 B는 A가 자기를 픽업하는데 소홀함을 보인다면서 다른 교회로 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교회에 앉혀 놓으면 뭐합니까?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볼 일 있으면 일반버스를 이용하지만 주일 날만은 픽업해 주지 않으면 당연히 그날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떤 교인은 자기를 픽업해 주시는 분에 대해 항상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픽업하러 왔을 때 따뜻한 인사는 물론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해 둔다든가 가끔 개스비를 드리면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교인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 시대에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의 공동체가 차원을 달리하는 그런 풍토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천주교처럼 ‘우리는 교인들을 픽업하지 않습니다’라고 광고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이참에 성숙한 성도의 삶을 기대해 봅니다.
유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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