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역에서 목회할 때 윤집사가 출석했는데 그는 여장부였습니다. 그녀는 모든 정황상 예수를 믿지 않을 것 같은 교인이었습니다. 성격도 치마만 둘렀을 뿐 여느 남자보다 더 남성화 된 교인이었습니다. 남의 눈치를 아량곳 하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에도 거침 없이 말을 받아치는 교인이었습니다. 속회모임(구역예배)에서 성경공부 할 때 질문에 답하는 과정도 조신한 구석이 없고 말도 거칠게 할 뿐 아니라 어떤 경우는 육두문자를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예배출석과 교회봉사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성격상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가 나가는 가게 주인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윤집사는 원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은 어느 교회 집사님이셨는데 참으로 좋은 주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인과 종업원의 관계를 성경대로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주인은 종업원을 가족같이 대해 주었을 뿐 아니라 매사에 존경스러울 정도로 차분하고 품격이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윤집사님은 이 가게에서 일한 지 10년 정도가 되었는데 어쩜 사람이 저렇게 한결 같을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본이 되는 주인이라 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그 주인이 가진 신앙때문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고 했습니다. 무슨 책인지 틈만 나면 읽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고 악보를 내어 놓고 흥얼거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성가대 찬양곡이었습니다.
어떨 땐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조심스럽게 알아낸 것은 주인이 남편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교회에 나가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원망하거나 남편을 욕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폭행 때문에 멍이 들고 파스를 붙이고 안대를 쓰는 그런 상황이 간혹 보이곤 했는데 저런 상황에서도 웃음과 친절을 잃지 않고 종업원들을 대하는 그 주인의 모습을 보면서 은근히 나도 저 주인이 믿는다는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고 교회가 과연 어떤 곳인지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그 주인의 영향으로 처음 교회에 출석한 곳이 바로 우리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인을 폭행한 그 남편은 언제부터인지 주인을 칭찬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만나면 “예수 믿으려면 우리 마누라처럼 믿어야 되는기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마누리가 진짜 예수쟁이지.” 폭행하는 남편을 한번 정도는 원망도 하고 욕을 할만도 할 텐데 10년 가까이 같이 있으면서 남편 욕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우리 주인이야 말로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주인의 믿음을 남편이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종업원도 인정한 믿음이었습니다.
또 다른 교회에서 목회할 땐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장로 가정입니다. 교회 내 중요 포지션에 있는 장로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한번은 그 장로집에서 속회가 있었는데 예배가 막 시작될 때 장로부인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남편이 보여준 생활방식 때문이었습니다. 아내의 눈에 보인 남편은 비인간적이고, 비신사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신앙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남편이 믿는 예수는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장로는 고사하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남편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목회할 때 지방회 모임을 마치면 목사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한번은 선배목사님이 우리들에게 기도부탁 한다면서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젊은 여집사님이 시부모로부터 심하게 핍박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처녀 때부터 신앙생활 잘 하는 집사였는데 결혼할 상대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랑과 시댁이 예수 믿지 않는 집안이었습니다.
믿는 집안이 아니니 집사 쪽에선 망설일 수밖에 없었고 시댁은 어떻게 하든 결혼을 성사시키고 싶었는데 처녀집사가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시집을 가더라도 신앙생활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결혼조건의 전부였습니다. 시댁식구들은 흔쾌히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결혼을 했습니다. 문제는 결혼한 지 3년이 되었는데 시댁에서 더 이상 교회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배목사님이 기도부탁하면서 내 놓은 그 교회 교인의 문제였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자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오히려 질문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잘 하던 처녀가 시집을 갔으면 그리고 3년이 지났으면 지금 쯤은 신랑은 물론 시부모님들도 교회에 출석해야 맞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 시점에서 교회출석을 금하는 이유는 뭐라 생각하나? 그 집사가 시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고 했는데 핍박이라니, 그 집사의 생활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틀림 없이 농번기에 교회 간다고 농사 일을 돕지 못했을 것이고, 교회 일이 바빠서 시댁 어른들의 식사에 대해 소홀히 했을 것이고, 교회 간다는 이유로 빨래는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고, 틀림 없이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기에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교회출입을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했더니 그 목사님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유목사 말이 맞다고 함으로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선에서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목회할 때 우리교회에 6.25 때 격전지에서 오른 쪽 다리를 잃고 상이군인이 되신 박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의 부인은 정권사님이셨는데 교회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심방을 나서면 항상 따라 나서는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방을 마쳤는데 바로 그 권사님 집 근처였기 때문에 그 집에 잠시 들리게 되었습니다. 박권사님은 집에 계실 땐 의족을 풀어놓으셨는데 의족을 풀어 놓으신채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식사를 제때 하지 못하셨는지 정권사님에게 “배고파. 밥 좀 차려 줘!” 그때 정권사님이 짜증 섞인 말투로 “집에 있으면서 밥 좀 챙겨 먹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그러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찬장을 열고 식은 밥 한 덩어리가 담겨진 그릇을 박권사님 앞으로 거의 집어 던지듯 던져 놓았습니다. 이때 박권사님이 나의 눈치를 보며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권사님을 밖으로 불러내었습니다. “권사님, 오늘 이 후로 심방가는데 따라 오지 마세요.” “목사님, 심방은 저의 사명이예요.” “무슨 소리! 권사님의 사명은 심방이 아니라 박권사님을 돌보는 겁니다.” 내가 그 교회를 떠나 미국에 올 때까지 심방팀에서 그 권사님을 빼고 같이 다니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고난 받는 시대가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도 아니고, 6.25와 같은 전쟁을 치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북한과 같은 공산국가도 아닙니다. 특히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라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핍박받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어느 여고생이 나에게 “목사님, 우리 아빠 신앙생활하는 거 믿지 마세요. 저건 모두 쇼업(show up)하는 거예요.” 평생을 목회하면서 이보다 더 잔인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나의 삶의 방식이 가족들에게 어이 없는 일로 비춰져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제일 먼저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게 정상이고 옳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보고 싶어 했는데 그 이유는 디모데가 가진 ‘거짓이 없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3대(代)에 걸쳐 내려온 믿음이었습니다. 부모인 우리가 가진 것이 없으면 자녀들에게 줄 게 없습니다. 우리가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이 믿음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긴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딤후 1:3-5)
유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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