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타 바바라에서 교회를 새로 시작함으로 힘겨운 날들이 계속될 때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배수의 진을 치고 장기금식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금식기도하겠다고 마음만 먹었는데 금식하기도 전에 독지가(篤志家)가 나타났습니다. 그 독지가는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 번창하여 또 다른 사업을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금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목사를 위해 쓰기로 하나님과 약속했다면서 나를 돕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 주신 천사였습니다. 그로 인해 하와이로 파송될 때까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금식 후 몸이 회복되었을 때, 비록 남의 교인이긴 하지만 경제적 도움을 주신 그 집사님 가정을 심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도 무언가 손에 쥐고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심방가기 전날 밤, 그 가정을 위해 철야기도를 하기 위해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 도착해서 강단 앞에 무릎을 막 꿇는 순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하고 있는 그 집사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틀림없는 그 집사님이었습니다. 눈을 떠도 보이고 감아도 보였습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나를 돕겠다고 나선 그 집사님을 위해 철야기도러 온 내 눈 앞에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하며 뒹굴고 있으니 두렵기도 하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다음 떨리는 마음으로 “주여!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게 무슨 환상입니까? 왜 이런 모습이 내 눈에 보입니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는 나를 돕는 자입니다.” 그날 밤 그 집사님을 위해 온 밤을 새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약속된 시간을 맞추기 위해 그 집을 향해 출발했을 때 어제 밤에 본 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한 상태에서 그 집에 도착했는데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시는 그 집사님 가족과 함께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도 보고 진정이 담긴 간절한 기도로 그 가정을 위해 축복을 빌었습니다. 예배 마치자마자 집사님이 ‘오늘 목사님을 만나지 못할 뻔 했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실은 오늘 오전 비행기로 2천5백 만 불짜리 프로젝트에 서명하기 위해 나이지리아에 가기로 했는데 집을 나서면서부터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나이지리아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대사관직원의 말이 내가 국제사기단에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나이지리아로 갔으면 죽임을 당하든가, 아니면 전 재산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신은 정말 운(運)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어제 밤에 본 그 환상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 환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런 사실을 그냥 본인에게 직접 알려 주시지 굳이 유목사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밤을 새워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은 어떻게 보면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축복의 원리’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마련해야 합니다. 축복의 손을 내릴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어떤 교인이 “목사님, 축복 기도 좀 해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그 축복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해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법’이라 했습니다.(갈6:7) ‘심고 거둠의 법칙’은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믿음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심은 게 없는데 어떻게 거둡니까? 그러므로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고후9:6) 이젠 이런 말을 하는 목사를 ‘전형적인 사기꾼’이라며 배척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필요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만들어 드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콜럼비아에서 목회할 때 새해 신년감사와 함께 기도제목을 적어내도록 했습니다. 담임목사가 앞으로 1년간 새벽제단에서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교인들의 기도제목을 알아야 기도할 게 아닙니까? 어느 한날 각자가 적어낸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젊은 교인이 적은 기도제목을 그대로 읽으며 기도했는데 갑자기 ‘분한 마음’이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의 기도제목은 이제 세살된 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기도제목을 적어 낸 그 교인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일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는 물론 헌금생활도 하지 않는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축복해 달라는 구체적인 기도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시간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왜 이런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맞이했는데 설교시간에 맨 뒤에 앉아 졸고 있는 그 교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졸던 그가 놀라 깨면서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어제 새벽에 기도하며 분노했던 그 마음을 가지고 그를 불렀던 것입니다.
“올해 기도제목에 OO이를 축복해 달라고 구체적인 내용을 적어 내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네!”라고 대답하자 “야, 인마! 주일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십일조 뿐 아니라 헌금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는 놈이 어떻게 이런 기도제목을 적어내냐?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OO이를 축복하니? 하나님이 OO이를 축복할 근거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그 순간 나의 이 한 마디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감사했던 것은 설교시간에 전체교인들 앞에서 망신을 준 목사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날로부터 십일조를 하는 교인이 되었는데 설교시간에 있을 수 없는 과격한 목사의 말을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 들였던 그 교인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럴 용기도 없지만 그때는 성격상 이런 게 가능했고 나의 분노는 그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이끄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가야바 법정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을 때, 닭이 울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대성통곡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마26:69-75) 베드로는 평소 예수님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배려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드렸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마16:16, 요6:68)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충정이었고 진심이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가야바 법정에서 주변상황에 의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지만, 그러나 그의 고백과 결단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베드로의 마음을 모를리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진정한 마음을 아시고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베드로를 빈정대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베드로를 세우기 위한 예수님의 배려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대해 자괴감에 빠져있을 그때 닭의 울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닭이 울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통곡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닭 울기 전’이란 말씀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그냥 실패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한해,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목사님들이 새벽마다 기도할 때 여러분들을 위해 손을 내릴 수 없게 해야 합니다.(출17:8-13, 딤전2:8) 기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드려야 합니다. 2020년은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안 될 근거를 마련해 드림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프로포즈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백성은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이사야 65:1-새번역) 나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2020년 이 한해를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유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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